헤일 메리

전부를 건 한 번의 시도

by 냄도

4쿼터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6초. 점수는 24대 30. 6점 차로 지고 있다. 짙은 패색이 공기에 덧입혀진 채 우리를 엄습한다. 팀원들의 얼굴이 어둡다.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면 어떨까. 아직 공은 하프라인도 채 넘지 못했다.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 공격이겠지. 남은 시간과 점수 차이를 고려했을 때,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다들 내 신호를 기다린다. 나는 손가락 두 개를 들어 V를 만든다. 마치 우리가 이길 것이라는 최면을 모두에게 건다. 상대 팀이 나를 죽일 기세로 달려든다. 나는 공을 밤하늘 가운데로 쏘아 올린다. 리시버들은 내 숨소리를 듣자마자 뒤도 보지 않고 달린다. 두 색의 유니폼이 어지러이 섞인다. 유선형의 공이 유유히 공기를 가른다. 이 공이 떨어지는 곳은 어디일까. 공을 던진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나는 기도를 올린다. 헤일 메리.

헤일 메리는 본래 천주교 용어로, ‘아베 마리아’라는 뜻이다. 기도를 올리는 대상인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말이다. 1975년 댈러스와 미네소타의 플레이오프 경기, 경기 종료를 30초 앞둔 시점에 이미 진영을 다 밀린 상태였던 댈러스가 극적인 50야드 롱패스에 이은 터치다운으로 경기를 역전했다. 경기 종료 후 쿼터백인 로저 스타우벅은 인터뷰에서 “마음을 비운 채로 성모송을 외우며 던졌다.”라고 말했는데, 이후 이 발언이 회자되며 성모송의 표현인 헤일 메리가 그날의 작전을 가리키게 되었다. 농구로 치면 ‘버저비터’가 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람의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라는 뜻이다. 정확한 어원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제갈공명의 일화이다. 적벽대전에서 승기를 잡은 촉나라는 위나라의 맹주인 조조를 화용도까지 몰아넣는 데 성공한다. 화용도는 대부분의 길이 좁은 산길이었고, 우회로가 없는 병목 지형이었기 때문에 소수의 병력으로도 퇴각하는 조조의 군대를 차단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그런데 제갈공명이 천문을 보니, 아직 조조의 별이 질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제갈공명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화용도에 관우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관우는 이전에 조조에게 몸을 의탁한 적이 있는데, 신의와 의리를 중요시하는 관우가 만약 조조를 살려준다고 해도 그것이 관우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빚을 덜어낼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다. 만약 관우가 대의를 우선시해 조조를 죽이면 전쟁은 즉시 종결되며, 적대국인 위나라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만약 천문대로 조조가 살아 돌아간다면, 그것은 하늘의 뜻임과 더불어 관우의 가책까지 덜어주게 될 것이다. 공명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쓰더라도, 결국 죽고 사는 문제는 하늘에게 달렸으니, 하늘의 명을 기다려 따를 뿐이라는 입장이었다.

재수생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일상의 낙을 찾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나마 친구들과 시시한 농담을 하며 웃음을 쥐어짜는 것이 전부였다. 그중 가장 많이 오갔던 농담 중 하나는 소위 말하는 ‘밸런스 게임’이었다. ‘5년 동안 수험 생활하는 대신 S대 가기’와 ‘지금 이대로 살기’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질문들. 당시에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어떠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그 사실이나 상황이 아니라, 그 노력의 끝에 아무 결실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었다. 빗대어 표현하면, 그건 마치 출구가 없을 수도 있는, 한 줌의 빛도 없는 긴 터널을 지나는 심정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노력은 결실을 보아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내가 열심히 했다고 한들, 결과로 보여주지 못하면 내 노력은 말뿐인 허상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실망스러운 수능 성적표를 받아 드는 순간 내 재수 생활 전체가 부정당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나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고, 나는 내 스무 살과 부모님의 피와 땀을 땅바닥에 버렸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렀다. 많은 일이 있었고, 그 이후로도 많은 다른 노력을 했고, 많은 감정을 느꼈다. 그때의 절망적인 감정은 이제 거의 남지 않은 듯싶다.

근래 들어 노력에 대해 자주 느끼는 것이 있다. 어쩌면 노력의 가장 큰 의미는 결실을 보는 것에 있거나, 실패를 딛고 성장하는 데에 있기보다도, 미련을 덜어내는 것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돌아보면 최선을 다하지 않은 채로 불행한 결과를 마주할 때마다 나를 괴롭게 했던 것은, 그 결과에서 오는 실패감이 아니라 왜 더 열심히 하지 못했는가 하는 미련이었다. 반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면, 비록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미련은 남지 않았다. 그저 내 능력이 부족했구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구나 하고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로저 스타우벅과 제갈공명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그 노력의 끝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공통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그 노력의 끝에서 신적인 존재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내 손을 떠났다고 생각했으니까.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과정에 최선을 다한 사람은,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도 그저 초연하고 덤덤히 결과를 기다릴 수 있다. 그 결과가 자신이 상상했던 최악보다도 더 절망적일지라도, 적어도 그 결과가 본인 때문은 아니라는 점에서 떳떳할 것이다. 물론 아쉬움은 남겠지. 속상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미련과는 다른 차원의 감정들이다. 미련은 지금의 나뿐만 아니라, 미래의 나까지도 갉아먹고 잠식할 만큼 아주 생명력이 강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만약 최선을 다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을 다할 기회조차 없었다면 그 기회를 어떻게든 만들어내는 것이 절박한 사람이 가져야 할 결연한 의지라고 생각한다. 다른 누구가 아닌 스스로를 위해서.

나는 가끔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어떤 미련들을 가진 채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될지 생각해 본다. 아무 생각도 안 드는 날은 하루도 없었지만, 정말로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엔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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