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아니함
온 우주를 통틀어 영원한 것은 단 하나도 없는데, ‘영원’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전 세계에 존재하는 언어의 수는 약 7,000개 정도라고 한다.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집단 내에서 매개체로 작용하면서 여러 정서나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언어가 문화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문화가 언어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언어는 그 집단을 대표하는 일종의 상징이 되곤 한다. 언어마다 정의하고 표현되는 단어의 개수는 천차만별이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등재된 영어 단어는 약 60만 개가 넘고,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한국어 단어는 약 50만 개 정도이다.
물론 언어는 조합과 문장, 은유와 설명을 통해 무한한 의미를 표현할 수 있지만, 특정 대상을 가리키는 단어가 명시적으로 존재하는지는 분명 그 언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단어는 특정 언어에만 존재하고, 그 단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의 특징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눈치’, ‘정(情)’, ‘한(恨)’과 같은 단어는 한국어에는 분명 존재하지만, 영어에는 정확히 일대일로 대응하는 단어가 없다. 모든 단어가 언어의 탄생과 동시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단어는 자연스레 사회 구성원 간의 경험과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축적된다. 그렇기에 특정 단어가 그 언어권에만 존재한다는 것은, 그 단어가 집단 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짐을 의미한다.
인지언어학에서는 어떤 개념이 언어 내에서 새로운 ‘단어’로 굳어지는 과정을 ‘어휘화’로 설명한다. 개념이 사회 속에서 자연스레 형성되고, 그것이 구성원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져 반복적으로 사용되면 단어가 된다. 즉, 개념이 먼저 형성되면 언어는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개념’이란 구체적인 대상과 경험적인 추상을 모두 포함한다. 구체적인 대상은 단어로 굳어지기가 쉽다. 어떤 나무에 매달린 주먹 크기이면서 구 모양의 빨간 열매. 아삭하고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 그 빨간 열매는 누구나 그 실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사과’라는 단어로 정의했을 때 개념의 혼동이 있을 일이 적다.
그런데 경험적인 추상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개념의 경계가 쉽게 흔들리는 경향이 있다. 추상적 개념은 감각으로 직접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해석과 상상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 사람마다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바가 다르고, ‘추운’이라는 단어에 대해 같은 날씨에도 누구는 춥다고 말할 수도, 누구는 이 정도면 괜찮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무리 추상적인 개념이라도 그것은 어떤 방식이든 누군가가 직접 느끼고 경험하는 일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심장이 쿵쿵 뛰고, 떨리고, 설레는 마음이 드는 적이 있어 그러한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었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는 손발이 시리고, 몸이 덜덜 떨리는 차가운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추운’이라는 단어를 만들었을 것이다.
‘영원’은 둘 중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느끼거나 경험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언어에는 이를 표현하는 말이 있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언어 중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추정 화자의 수가 가장 많은 순서대로 정렬했을 때, 1위부터 20위까지의 언어에는 ‘영원’을 의미하는 단어가 예외 없이 존재한다. 사실상 지구상의 모든 문화권에 존재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일상적으로는 ‘영원’을 무한히 긴 시간을 표현하는 경우에 많이 사용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영원’의 정의는 세 가지이다. ‘어떤 상태가 끝없이 이어짐. 또는 시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아니함.’, ‘보편적인 진리처럼 그 의미나 타당성이 시간을 초월하는 것.’, 신이나 진실성처럼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 공통으로 ‘시간을 초월’한다는 표현이 포함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단어 자체로 변하지 아니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인간은 시간을 초월할 수 없는데, 왜 ‘시간을 초월함’을 의미하는 단어를 떠올렸을까. 그리고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와 결핍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무엇도 시간을 초월할 수 없고, 변하지 아니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지난밤 내린 눈이 한나절을 채 버티지 못하고 녹아 스러졌다. 활활 타오르던 감정이 조금씩 옅어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말았다. 갓난아기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얼굴에는 주름살이 패였고, 거동이 쇠하더니 결국 숨을 거두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대국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물며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까지도 그 시작과 끝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온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을 떠올렸다. 비록 그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면 남은 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는 현실임을 알지만, 그래도 떠올려냈다. 그것은 말뿐이지만 분명 결핍에 대한 해소였고,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강한 바람이었다. 그래서 ‘영원’이라는 단어는 바랄 망(望)으로 표현되는 여러 마음, 이를테면 희망이나 소망, 갈망이나 욕망 같은, 그런 마음을 한 데 담은 아주 강력한 단어가 되었다. 시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고 유지되기를 바라는 어떠한 대상에게 그 단어를 덧붙임으로써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원’은 언제나 모순적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 그래서 ‘영원했던’이란 말도 존재할 수 있다. ‘영원’은 어떤 대상의 성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결코 영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영원’이라는 단어를 거의 쓰지는 않지만, 누군가 그 말을 헤프게 쓰는 것을 보아도 전혀 밉지 않다. 분명 그것이 일종의 거짓임을 알지만, 그것 외에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더 좋은 말이 없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나도 무언가가 영원하길 간절히 바랄 때가 있다. 설사 영원하진 못하더라도, 내게 주어진 마지막 숨이 거두어지는 그 순간까지는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한 듯싶다. 그러면 나는 그것이 변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고, 나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것과 다름이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