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ka Jan 24. 2024

아들이 대신 써주는 엄마의 인생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엄마의 파란만장한 인생이야기 #2



2. 아들 딸의 탄생


어느 한날은 버스기사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시장본 것들을 들고 서 있던 나는 살짝 넘어지면서 무릎과 정강이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집에 와서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고 있던 사람을 깨워 밥을 먹고 출근하던 그 사람이 나의 다리를 휙 쳐다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출근, 퇴근했다.     


저녁에 밖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데 방으로 불렀다.     


너 다리가 그게 뭐냐. 어느놈이 그랬냐. 어떤놈과 같이 있다왔냐며 마구잡이로 때렸다.     


버스안에서 다쳤다고 아무리 얘길해도 믿지않고 임신 8개월 부른배를 안고 있는 나를 그저 밟고 때리고 뱃속에 아이도 다른남자 아이라고 억지부리며     


기절하고 일어나면 또 때리고     


기절하면 물 붓고 일어나 해명하려면 때리고 물로 일으키기를 몇 번     


정신을 잃었다가 일어나 보니 배는 아프지 않고 방안은 온통 물바다가 되어있었다.     


그래놓고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나는 먼저 뱃속에 아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리곤 부른배를 부여잡고 

     

어린나이에 아무것도 모르고 너를 덜컥 가져 배속에서부터 고생을 시키네 미안하다며 하염없이 배를 잡고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니 어질러진 방이 눈에 들어왔다.     


물에 젖어 널부러진 옷이며 이불이며 모두 밖에 내어놓고 물을 닦았다.     


미닫이 방문 유리창도 발로 차버려 유리조각이 산산조각나 있는 것을 보고 너무나 어이가 없고 무섭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살아보기로 했다.


아이를 가지니 왜 그렇게 먹고 싶은것도 많은지...


매일 다니는 시장길에 중국집이 있었다.


중국집에서 새어나오는 짜장면 냄새가 얼마나 달콤한지...


그 냄새에 홀려 식당 환풍기 아래서 냄새만 실컷 맡고 집에 돌아올 때 500원 짜리 짜장면 한그릇도 맘대로 못먹는 처량한 내 인생이 얼마나 불쌍하던지...


그래서 나는 지금도 짜장면을 먹지 않는다.


신것도 달달한 것도 모두 나에게 꿈속 일이었다.     


그렇게 모진생활 속에서도 배속에 아기는 무럭무럭 아무탈 없이 커가고 있었다.     


병원에 한번 안가고 순산했다.     


조산소에서 4.3kg 건강한 아기를 탄생시켰다.     


출산 후 난 술 장사 못하겠으니 다른거 하자고 했다.     




그래서 고기와 술파는 것 대신 시장안에서 조그만 꽃집을 차렸다.     


평수는 작지만 뒤에 조금 쉴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아가는 그 쉴 수 있는 공간에 이불을 깔고 꽃집을 경영했다.     


꽃, 붕어, 아이스크림 기계도 가계앞에 놓고 장사를 했다.     


저녁시간이면 시장안이 시끌벅적 한바탕 전쟁치듯 바쁜시간을 보낼동안 울 아가는 엄마 고생하는 걸 아는지 배만 부르면 울지도 않고 잘 자고 놀아주었다.     


꽃가게 하는 동안 둘째가 생겼다.     


둘째는 입덧도 너무 심해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물만 먹어도 토하니 사람이 살 수가 없었다.     


3개월이 지나니 조금씩 살것같았다.     


둘째도 아무일 없이 순산해서 건강하게 자랐다.     


하는일은 두배 세배로 늘어났다.     


그때는 애기 아빠가 거주지가 명확하지 않으니 군 입영영장을 전달받을 수 없던 터라 군입대를 미루고 있었는데,     


가족이 생기고 정확한 주소지가 생기니 입영통지서가 날라왔다.     


애기들 나 세식구 먹고살아야 되니까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애기 둘 재워놓고 방문을 잠궈놓고 꽃시장으로 향했다.     


집에 와보면 둘 다 일어나 엄마찾고 울고불고 눈물에 콧물에 한 애는 오줌싸고 한 애는 똥싸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눈물없인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군 입대 했던 애기아빠는 애기가 둘이나 있어 방위로 빠졌다고 4주 훈련 후 집가까운 곳에 배치받았다.     


다행이 윗분이 사정을 봐주셔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근무서는 배려를 받았다.     


그러면서 돈을 조금 벌었고 꽃집은 그만두고 80년대 그 시절에 보기 드문 큰 슈퍼마켓을 오픈했다.     


아이들도 이젠 커서 어린이집에도 가고 둘째는 어려서 데리고 장사를 했다.     


그때는 대형마트가 없었으니 그나마 동네에서 알아줄 만큼 이름을 알렸다.     


없는 것 없이 명절도 휴일도 없이 365일 오픈 열심히 했다.     


그때는 애기아빠가 아침일찍 물건을 떼다주고 출근을 했다.     


하지만 저녁엔 손님이 몰려오면 애기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장사를 했다.     


그러다 둘째는 잃어버리고 찾기를 몇 번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수십키로 밖에 있는 파출소에서 찾아오곤 했다.     


슈퍼마켓 3년 적당한 사람이 있어 넘겨주고 해운대 전세가게를 얻어 장사할 만큼 돈을 모았다.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아들이 대신 써주는 엄마의 인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