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반격>을 읽고
내가 우주 속의 먼지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지하는 순간 빛을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도 있다고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렇게 하면, 굳이 내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힘주어 소리치지 않아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 생각을 얻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조금 시시한 반전이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건 언제나 사실이었다는 거다.
- 서른의 반격 232p -
‘그냥 빈칸으로 보낼까?’
아이가 학교에서 가져온 종이 한 장을 앞에 두고 한 참 눈싸움을 했다. 아이의 신상 및 가족 관계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했다. 빈칸을 술술 채워가다가, ’ 직업’이라는 제목 앞에서 갑자기 손이 멈추었다. 다른 가족들의 직업은 척척 적으면서, 막상 내 직업은 무엇을 적어야 할지 한참 고민을 했다. 두 세 단어만으로 가득 찰 작은 빈칸 앞에 멈추어서, 나는 한 없이 작아졌다. 단어 하나가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그 단어만큼은 적고 싶지 않았다. ‘주부’
급하게 직업을 찾기 위해 인터넷 검색 창을 열고, '직업'이라고 재빠르게 자판을 두드렸다. 직업이란 생계를 유지하지기 위해서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이라고 한다. 나에게 주부는 적성에 맞지도 않고 능력조차 없으며, 생계를 유지할 목적도 없으므로 직업이 아니라는 이유를 꾸역꾸역 찾아낸다. 하지만 직접 돈을 벌지 않아도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주부도 분명한 직업이라고 굵게 강조되어 있는 곳에 발목을 잡혔다. 결국 ‘주부’를 피할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최대한 작고 흐릿하게 빈칸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퇴사 전까지, 학교나 직업을 써야 하는 빈칸을 망설임 없이 채웠다. 평생 함께한 이름보다 학교, 직장 그리고 직업 등이 나를 더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처럼 당당했다. 사회 속에 암묵적인 약속 덕분에 어떤 사람인지 시시콜콜 설명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다. 몇 개의 단어만으로 나를 간결하게 전했고, 상대방은 나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나에게도 스스로 존재를 인식하고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준이 되었다.
서른 중반, 갑자기 이름 석 자만 손에 쥐고 세상에 던져졌다.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부르는 고유 명사가 이름인데, 막상 세상 속에서 이름은 나를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했다. 세상에는 참 많은 내 이름이 존재했다. 이름만으로 구별 짓는 것이 부족한 세상에서 나를 표현할 것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나를 대변한다고 믿었던 것을 잃고 나자 비로소 나는 진짜 ‘나’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평생 무관심했던 나에게 눈길을 건네기 시작했지만, 무척 어색하고 낯설었다. 거울 속에 내 눈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불편함을 견뎌야 하는 것이었다.
한동안 나에 대한 무관심을 보상이라도 하듯, 떠들썩한 세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에게로 침잠했다. 많은 사람이 불합리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이고, 파렴치한 세상을 향해 작은 손길을 모을 때도 한결같이 외면했다. 세상을 향한 외침보다 나를 위한 변화가 절실했다. 심지어 가족보다 내가 더 중요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에도 해내지 못한 일이 나를 괴롭혔다. 앞서가는 세상의 빠른 흐름과 자신의 지지 부지한 변화를 비교하며 자책의 화살을 던졌다. 변화가 먼지처럼 보잘것없고 하찮게 느껴졌지만, 이상하게 물러서거나 주저앉을 수 없었다.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지만, 주어진 삶에서 도망가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렇게 아등바등 발버둥 치며, 어느덧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낙수가 바위를 뚫는 것처럼, 애쓰고 견디는 시간이 쌓이자 내면의 침묵을 깨고 세상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혼자 열심히만 달리던 시간은 온 가족이 함께 손을 잡고 즐기는 시간이 되었다. 책을 읽고 함께 나누며 의미를 더하고, 부끄러운 글도 쓰고 함께 나누면서 유쾌함을 더한다. 작은 손길이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손길을 내민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당당하게 말하고, 위대한 꿈도 과감하게 적어본다. 시간과 정성의 물방울이 모여서 내면의 그릇을 가득 채운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넘실거리는 물결이 자연스럽게 넘쳐흘러 세상을 향해 잔잔하게 퍼져나간다. 혼자 있는 시간의 충만함에 함께 하는 시간의 풍요로움이 더해진다. 비로소 이름 석자로 나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고, 더 이상 주부라는 단어 앞에 작고 초라해지지 않는다. 둘째가 입학을 하고 가져온 같은 종이에는 멈춤 없이 모든 칸을 채워갔다. 내 직업은 여전히 '주부'였다.
며칠 전, 40개의 초가 생일 케이크 위를 빼곡하게 밝혔다. 주부라는 단어 이상으로 낯설고 거부감이 드는 '마흔'이다. 이제는 나이의 의미를 애써 찾지 않는다. 서른과 달리 조금 더 넓고 깊은 마흔을 맞이할 수 있어서 충분하다. 앞으로 내 삶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내 모든 것을 품을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