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말뚝>을 읽고
하나같이 옷 잘 입은 사람들, 심심찮게 눈에 띄는 양복쟁이들, 번들대는 기와지붕, 네모나고 유리창이 달린 이층 집들, 흙이 안 보이는 신작로, 가게마다 즐비한 울긋불긋하고 신기한 물건들, 시끌시끌하면서 활기찬 소름... 이런 대처의 번화가 맹종하고 있는 질서가 나를 주눅 들게 했다. 그거야말로 참으로 낯선 거였다. 대처 사람이 된다는 건 바로 그런 질서에 길들여지는 거라는 걸 나는 누가 가르쳐주기 전에 본능처럼 냄새 맡고 있었다. 오래 방목된 야성이 내 속에서 벌써 주눅이 드는 걸 느꼈다.
- 엄마의 말뚝 30p-
그녀는 서울에 가기로 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미 결정된 삶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당연히 대학에 가야 했다. 한 번도 이유를 묻지 않고, 많은 대학 중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선택했다. 급하게 날조한 목표였지만, 그녀와 그녀의 삶은 간결하게 목표로 수렴했다. 혹시 이유를 찾아 머뭇거리고 주춤할까 봐, 책상 앞에 대학교 사진 한 장을 두었다. 사진은 늘 그녀를 지켜보고 응원했다.
사진의 기운에 이끌려 원하는 대학교에 합격했고, 성취감은 하늘을 찔렀다. 뭐든 할 수 있다는 기대감과 새로운 곳을 여행한다는 설렘으로 서울로 갈 준비를 했다. 서울에 간다는 것은 평생 함께 살아온 부모의 곁을 떠나서, 삶에 큰 획을 긋는 변화였다. 하지만 그녀는 앞으로 거대한 변화 속에서 겪어야 할 이질감 알지 못했다. 모르는 것이 약일까? 그녀는 곧 찾아 올 불편함과 그리움을 알지 못한 채 낯선 삶 속으로 즐겁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새로운 것을 채우기 위해 이전 삶을 재빨리 지우고 잊어야 했다. 그래서일까? 집을 떠나는 '그날'조차 아무리 떠올리려 애써도 남아있는 기억이 한 조각도 찾을 수 없었다. 급하게 먹은 음식은 탈이 나기 마련, 채기를 느끼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거대한 서울 속에서 어디 한 곳 머무를 수 없는 작은 먼지 같았다. ‘강남과 강북’에 단순히 방향이 아닌, 원어민만 느끼는 미세한 뉘앙스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방인이었다. 방향에 숨은 미묘한 차이를 알아가면서, 기대와 설렘은 주눅과 그리움으로 빠르게 대체되었다. 서울에서 한동안 집이 아닌 방에서 지냈고, 지상이 아닌 지하로 다녔다. 대문을 지나 줄지어진 방 중 하나일 뿐이었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어두침침한 땅속 같은 삶을 살았다. 혼자가 아니었지만 외로웠고, 다양한 곳을 다녔지만 땅 위 서울을 알지 못했다. 과거에 대한 물음에는 늘 부연 설명을 더해야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어느 순간, 현재의 자신조차 이름 석 자만으로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덕지덕지 자신을 꾸미며, 서울을 닮아갔고 기꺼이 길들여졌다. 어느새 서울의 모습처럼 화려해졌지만, 진정한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서울이란 공간에 이질감을 느끼며 어떻게든 익숙해지고 속해보려고 애썼다. 사투리는 잊었으나, 정확한 서울말은 아니었다. 사는 곳은 서울이지만, 명절이 되면 엄청난 인파에 섞여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완전하게 서울의 품에 안기지도 못했는데, 익숙하고 편안한 과거조차 묘한 이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견디고 애쓰는 시간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 그녀는 과거와 현재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완벽한 이방인이 되어 버렸다.
*
어느덧, 그녀는 부모와 함께 한 시절보다 서울에서 지낸 시간으로 저울이 기울어지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한 칸의 방이 아닌 어엿한 집에서 산다. 강북과 강남에 숨은 묘한 차이도 알게 되었고, 지상으로 다닐 만큼 서울의 지리도 알게 되었다. 강이 북쪽을 향하는 곳에 터를 잡고 살아보니 미묘한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사람 사는 곳은 별반 다른 게 없다. 길을 다니면서 많이 헤매고 종종 주변에 물어보기도 하면서 두려움과 친해졌다. 서울에서 보낸 시간의 무게가 더해질수록 이질감이 한결 부드러워지고 그녀를 누르던 서울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졌다. 바람을 견디며 깎이고 다듬어지는 바위처럼.
이제야 부모와 살던 곳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도 그녀에게 20년 전 과거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어둠이 찾아오기 전, 거대한 태양이 한강 주변을 물들이며 서서히 사라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과거의 자신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