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을 읽고
카톡 단톡방에는 항상 읽지 않은 대화의 숫자가 쌓여있다. 단출한 단톡방의 경우는 대화의 흐름을 따라갔는데 요즘은 어떤 단톡방도 귀찮다. 유령같이 지내는 단톡방을 찾아다니며 쌓인 숫자를 지우는 시간이다. 그날따라 무슨 생각이었는지 쌓인 대화를 거슬러 올라가며 읽기 시작했다. 에니어그램에 관심이 있어서 심도 있게 공부하는 지인이 유형 검사를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종류의 검사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 평소와 달리 천천히 대화를 읽으며 질문에 대해 고민하며 답을 하고 있었다.
K : 에니어그램은 3가지 힘의 근원에 따라 장, 가슴, 머리 유형으로 나눠요. 자극이 생겼을 때 어느 신체 부위가 반응하는지 살펴보세요. 첫 반응 후 다른 반응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가장 먼저 반응하는 신체 부위를 찾는 게 유형 진단의 핵심이에요. 생활 속에서 찬찬히 관찰해 보세요!
C : 첫 번째 질문부터 어렵네요. 장과 머리 중 먼저 반응하는 부분이 헷갈려요. 급작스럽게 긴장을 할 경우 장이 불편하지만 일반적인 자극일 경우는 머리가 먼저 반응을 하는 것 같아요. 뒷덜미가 뻐근해진다던가, 머리 주변에 열이 차거나 무겁고 지끈거리는 느낌이 있어요. 지금도 머리가 아파요. ㅎㅎㅎ
K : 무의식적으로 반응을 하다 보니 알아차리기가 어렵죠. 에니어그램 훈련은 자기 관찰, 자기 이해, 자기 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무엇보다 첫 단계인 자기 인식이 중요해요. 머리가 가장 먼저 반응한다니 머리형이에요. 아래 세 가지 질문 중 가장 싫은 것을 찾아보세요.
1️⃣ 너무 재미있으셔서 우리 모임에서 꼭 필요한 분인데 좀 일 처리를 옛날 방식대로 하시네요
2️⃣ 재미있으시고 일도 정말 잘하시는데 우리 공동체랑은 결이 맞지 않으신 것 같으니 나가주세요.
3️⃣ 능력이 참 좋으셔서 우리 공동체에서 꼭 필요한 분이신데 좀 재미가 없으시네요. 노잼.
C : 음... 결이 맞지 않으면 제가 먼저 나갈 것 같고, 재미보다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가장 듣기 싫고 거슬릴 것 같아요. 1번요!
K : 5번 유형인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능력 없음이 근원적 두려움이에요. 세상에 충분한 자원이 없다는 왜곡된 관점 바탕으로 자신이 가진 자원이 미비하다고 느껴요. 얼마 있지 않은 자원이 소비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죠. 자신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자원만큼은 빼앗기지 않으려는 소극적 방어적인 태도를 갖게 되고, 그것을 탐욕이라고 하죠.
C : 소름 끼치게 족집게 같아요. 숨겨 둔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럽고 당황스럽네요.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고 어떻게 채울지를 고민하거든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콩쥐의 물독처럼 아무리 애써도 만족할 수 없으니 불안감이 더 커졌어요. 채울 수 없으니 지금 가지고 있는 바닥의 물이라도 잘 지키려고 신경을 곤두세웠어요. 매번 포기하고 차단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도움을 거부하거나 타인에게 쉽게 손을 내미는 것이 유난히 어려운 이유를 알았네요.
K : 맞아요. 세상을 바라보는 왜곡된 관점인 ‘인색’이 성격 및 행동 패턴에 영향을 주지요. 왜곡된 관점이 변화해야 개선이 되는데, 5번 유형은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성향이 강해 변화 자체가 힘들어요. 편협하고 세상을 머리로 이해하는 특성 때문이죠. 따라서 머리보다 본능에 더 눈을 떠야 해요. 맹수가 우글거리는 야생에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오래 고민할 겨를 없이 즉시 생존을 위한 행동을 하잖아요. 그런 환경이 필요해요
C : 그럴 것 같아요. 외적으로 밝고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편이에요. 늘 행동보다는 생각이 너무 많고요. 그래서 머리가 자주 아픈가 봐요. 세상을 부정적으로 인지하고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본능에 솔직하지 못한 경우가 많더라고요. 결국 남의 눈치를 보거나 내 욕구를 무시하고 억압했어요
K : 잘 이해하고 있네요. 왜곡된 관점을 바꾸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C : 세상에는 충분한 자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내 안에는 이미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마음일 것 같아요.
K : 잘 이해하네요! 종교에서 ‘전지전능한 창조주’라고도 하죠. 근원이 풍족하므로 나 또한 자원이 풍족하고 넘치는 자원으로 살고 있다고 세상을 바라봐야 해요. 더 채우거나 아끼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거죠. 세상이 풍요롭고 자원이 무한하기 때문에 매달리 필요가 없다는 마음이 생겨요. 여전히 부족하지만 매달리지 않겠다는 다짐과는 다르죠. 현실에서 벗어나는 도피가 아니라 솔직하고 의연해지는 충만한 삶이 되는 거죠.
C : 세상에! 요즘 제 삶의 키워드가 <감정, 솔직, 풍성, 충만>이거든요. 지금까지 너무 감정을 무시하고 억누르고 살았더라고요. 늘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니 감정이 그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처럼 느끼고 인위적으로 배제했어요. 머리를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고요. 감정 안에 엄청난 정보가 담겼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도려낸 감정을 되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감정을 배제자니 욕망이 사라지고 나에게 솔직하지 못한 삶게 되더라고요.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삶이죠. 내가 원하는 것을 찾고 그것에 솔직한 삶을 살고 싶어 졌고요. 충만함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 그냥 끌리는 단어였어요. 나무가 푸른 녹음을 뽐내며 잎사귀를 풍성하게 뻗고 있는 모습을 보면 따스함이 차오르고 너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과정이 머리로 계획하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온 것이라 더욱더 놀라워요.
K :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볼까요? 5번 유형의 하위 욕구가 3가지 있는데요. 자기 보존적 욕구인 ‘피난’, 성적 특성인 ‘신뢰’ 그리고 사회적 욕구인 ‘상징’이 있어요. 피난은 자원 부족에서 기인해 사회적 접촉을 피하고 진정으로 고립과 고독을 즐기는 모습이에요. 신뢰는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의존적인 성향을 보이는 건데요. 이것 또한 한정된 자원을 소모하지 않기 위한 행동이죠. 상징 역시 사회에서 상호작용을 하고 인정받고 싶은데 지식이라는 자원이 부족하다는 불안에서 발생해요. 소모적인 잡담이나 일상 대화를 피하고 지적인 토론을 즐기죠. 감정적 반응이 적고 쿨한 척하는 사람으로 간달프나 제갈공명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겠네요. 에니어그램의 다른 유형인 3번이나 8번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어요.
C : 소름 돋고 무섭기까지 해요. 제가 고립된 시간을 갈구하고, 관계 의존적인 성향이 강하거든요. 잡담하는 것에 피로감을 많이 느끼고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좇아가는 성향이 강해요. 개인적으로 간단한 에니어그램 검사를 했을 때 8번으로 나온 적이 있어요. 모든 것이 하나의 줄기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니 쉽게 믿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자원이 부족하다는 인식부터 문제였군요. 부족한 자원이 소비되는 것을 힘들어하고, 인색함 때문에 자원을 소비하고 싶지 않은 갈망을 갖게 되고 그 갈망을 채우기 위해 깊이 있고 지적인 생각의 세계로 도피하게 되는군요. 요즘 자꾸 불편한 마음과 생각이 드는 이유를 조금 이해할 것 같아요. 그런데 이해해서 마음은 편한데, 깊고 깊은 골짜기처럼 느껴져서 무섭고 두렵네요. 과연 변할 수 있을 것인지. 에니어그램이 자기 관찰, 자기 이해, 자기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앞으로 변할 수 있는 거죠? 불쑥 의심이 드는 것도 어떤 왜곡된 관념에서 기인하는 건가요?? ㅎㅎㅎ
K : 에니어그램은 9가지가 있고, 어떤 에너지든 선택할 수 있어요. 자신의 진정한 욕구 찾고 그것을 채우는 선택으로 집착에서 벗어나 삶을 자유롭게 나는 것이 에니어그램의 목적이에요. 앞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이 쓰지 않는 날개를 건강하게 사용하도록 안내해 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질문을 하나 더 드릴 거니 생각해보고 답해주세요. 이 질문은 자기 유형의 양쪽 에너지 중 어느 쪽을 더 많이 사용하는지 찾게 해 줄 거 에요. “공동체를 위해 세부적으로 준비하시는 편이신가요? 예술적 활동 (감수성 높은)을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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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대화가 끝났고 추가로 던져진 질문을 마음에 품고 카톡방을 나왔다.
질문 자체가 또 어렵다. 아니 나란 사람에 대해 여전히 모르는 게 많은지도. 공동체와 예술활동이라? 글쓰기나 그림에 관심이 갖는 것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이 또한 왜곡된 관념이 작동해서 발현된 행동이 아닐지.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듯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 두려워졌다. 의심이 생기고 두려워지는 것이 변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서 기인하는 것일지. 도돌이표에 갇혀 비슷한 생각이 반복되자 갑자기 블랙홀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갑자기 에너지 소모가 심하니 피곤해진다. 그냥 무시할걸…
★ 이렇게 에니어그램 5번에 대해 분석하는 글을 쓰는 것도 5번 유형의 특징일 수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