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꿈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읽고

by 눈부신 일상
“부인, 천천히 하시지요. 날이 덥습니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 중에서


집 밖을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지 열흘째다.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자가 격리’라는 단어가 크게 와닿지 않았다. 배송 시스템이 잘 발달하여 있고 이미 시스템을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어서 열흘 동안 집에만 있어도 삶을 영위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지그시 눈을 감고 바라보며 한 발짝 떨어져서 지내는 시간도 나쁘지 않다. 명절 대이동으로 고속도로 정체가 시작된다는 소식을 거실 소파에서 들으며 여유롭게 김영하 작가의 시칠리아 여행기를 펼쳤다. 간단하게 핸드폰을 몇 번 클릭하니 책장이 열리고 바로 여행이 시작된다. 스마트폰 이전 시대에 경험한 마지막 여행기를 느긋하게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하며 읽어가다니.


<오래 준비해온 대답>은 2009년, 내가 결혼하던 해에 출간된 책이다. EBS 여행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던 PD가 김영하 작가에게 프로그램을 찍으러 가기를 제안했다. 어디를 가고 싶냐는 물음에 그는 마치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말한다. “시칠리아요.” 한 번도 진지하게 시칠리아를 가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촬영을 하며 일주일 남짓 그 지역을 대강 스친 것이 전부였는데, 어느새 그는 시칠리아에 푹 빠져들었다. 당시 그는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방송일을 하는 과정에서 내면의 갈등이 쌓였고 삶에 작은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과 파랗고 잔잔한 지중해 그리고 느긋한 여유를 품은 시칠리아에서 오랫동안 상상하던 이탈리아를 만났고, 바쁜 일상에 가려진 그의 꿈 또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시칠리아를 떠난 지 불과 다섯 달 만에 아내와 함께 다시 그 섬으로 떠나며, 정착민 삶을 정리하고 내면의 어린 예술가를 찾기 위해 흘러가는 삶을 시작한다. 시칠리아에 도착해서 묵을 호텔을 공중전화로 예약하며 시작한 여행은 10년이라는 시간의 기억과 기록이 더해져 일단락을 맺는다. 방구석에서 작가의 긴 여행을 함께 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중해의 파란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가을 하늘이 옛 추억 속으로 나를 흘려보냈다.


2009년 봄, 신부 화장을 한 채 밤 비행기에 실려 꼬박 하루 만에 그리스의 산토리니에 도착했다. 여행 가방에는 안내 책자와 지도 그리고 각종 프린트물이 들어있었고 산토리니에 도착하는 긴 시간 동안 여러 번 꺼내서 읽고 표시를 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아무리 지도를 보고 정보를 수집해도 막상 여행지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다. 3차원의 넓은 공간을 종이 한 장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헛된 욕심이라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다행히 산토리니는 아주 작은 섬이라 차로 반나절만 돌면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어서 금방 섬이 익숙해졌다. 꼭 봐야 할 관광명소도 특별한 맛집도 없는 곳이라 시간을 촘촘하게 채운 여행 계획도 필요하지 않았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이아마을에서 머물렀는데, 150m 절벽에 위치해서 에메랄드빛 바다와 멋진 석양까지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숙소는 절벽에 동굴처럼 위치했고 무거운 여행 가방을 들고 좁은 돌계단을 한참 내려가야 했다. 절벽이 만든 발코니에 앉아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했고 발길이 닿는 곳을 한적하게 거닐며 색다른 경험을 즐겼다. 촉박하게 준비한 힘든 결혼식을 보상받는 듯 느긋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누렸고, 아쉬움에 산토리니를 떠나며 말했다. “결혼 10주년에 다시 오자!”


결혼 13년 차,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산토리니의 추억이 우연히 펼친 책으로 무심히 들춰졌다. 10년쯤이면 삶은 풍족하고 안정될 것이고, 나는 성숙하고 여유 있는 중년이 되어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산토리니를 다시 찾을 만큼. 인생과 결혼의 현실을 전혀 모르는 신혼여행에서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꿈이었다. 한 명이 둘이 되고 다시 셋이 되는 삶은 생각만큼 순탄하고 매끄럽게 흐르지 않았다. 안정보다는 불쑥불쑥 찾아오는 예상치 못한 일로 한없이 흔들렸고 그 안에서 나약하고 무능력한 나를 마주했다. 집 근처 공원에 나가는 것에도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한 현실을 떠올리니 삶에 자만했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멋진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괜히 야속했다.


문뜩 창문 밖 파란 하늘 속에 ‘나’가 보인다. 산토리니 사진 속에 파란 지중해를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과 사뭇 다르다. 생기도 없고 꾸미지 않은 초췌한 모습이지만 편안하고 잔잔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싫지 않다. 조금 늙은 나는 다양한 시간을 통과하면서 세상과 인생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호기심은 관심을 이끌었고 관심은 부단히 나를 움직이게 한다. 움직인 시간과 노력만큼 삶과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흔들리는 시간을 통과하며 우연히 산토리니의 꿈을 다시 찾았다. 생기발랄할 때 품은 꿈은 간절하지 않아서 금방 잊어버렸다. 긴 터널을 지나 다시 만난 꿈은 한층 단단해졌고 전혀 허황되지 않다. 지금의 나에게 산토리니는 당장 현실이 될 수 있는 꿈의 영역이다. 당장 마스크를 쓰고도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더 이상 한숨이 나오지 않는다. 진짜 내 삶에 중요한 가치를 생각하며 꿈꿀 수 있을 만큼 성숙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풍족함과 여유 그리고 성숙의 끝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포기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삶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조금씩 넓고 깊어지고 있다. 13년 동안 굽이치며 흐르는 삶 속에서 많은 꿈을 잊었지만, 여전히 나는 어디로 흐르고 있다.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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