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눈부신 일상 Jan 07. 2023

엄마와 딸, 그 사이를 채우는 것

<H마트에서 울다>를 읽고

“그 끝없는 잔소리가 지겨울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제발 편하게 좀 먹자고 곧잘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대개는 그 잔소리가 한국 엄마들이 하는 최고의 애정 표현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고, 그 사랑을 소중히 여겼다. 그걸 되찾을 수만 있다면 당장 무슨 일이라도 다 하련만…”    <H마트에서 울다>중에서



어릴 적 엄마와 나 사이는 말보다 침묵이 채웠다. 기억 속의 엄마는 강직하고 엄하면서 부지런했다. 엄마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사이에서 단호했고 어린 나에게 무섭게 다가왔다. 나는 일하는 엄마의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딸이었다. 타인에게 마음을 보이기 꺼리고 조잘조잘 말하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엄마에게 시시콜콜한 생각이나 마음을 꺼내지 못했다. 엄마의 잔소리만 이어지고 수용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에 나를 솔직하게 보이기 어려웠고 엄마 앞에서는 긴장했다. 각자의 역할에 책임을 다하며 지내다 보니 둘 사이에는 꼭 필요한 말만 남았고 엄마에 대한 아쉬움과 서운함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대학 입시를 끝낸 후, 핸드폰을 사주지 않는 엄마에게 삐쳐서 입을 굳게 닫은 채 집을 떠나며 서운한 마음을 가득 담은 편지 한 통을 남겼다. 엄마 품을 떠나는 인생의 큰 변곡점이라는 것을 그 당시는 알지 못했다. 대학 1년, 해방감에 취해 엄마의 부재를 느낄 틈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취기가 가시자 엄마의 빈자리를 홀연히 느끼며 홀로 있는 삶이 허전하고 외로웠다. 가끔 엄마를 찾은 날이면 집안을 가득 채운 온기에 마음이 녹아 잠들며 눈물을 훔치곤 했다. 여전히 둘 사이 대화는 적었지만, 날카로웠던 감정이 서서히 무뎌지고 지겹던 잔소리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엄마는 주말마다 기차를 타고 서울에 왔다. 백화점을 돌아보며 물건을 고르던 시간이 둘 사이를 채웠다. 첫 출산 때 진통이 시작되었다는 전화에 엄마는 이른 아침 차를 타고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왔고 아기를 낳고 지쳐 병실에 누워있는 나를 보며 말없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엄마를 보자 갑자기 쏟아지려는 눈물을 삼키느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침묵의 시간이 우리 사이를 메웠다. 엄마는 우는 아기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함께 울고 있는 내 품에서 아기를 건네받아 달래주었다. 지친 내가 한 숨 자고 밥 한 숟가락 먹을 수 있게 챙겨주던 따뜻한 손길이 달콤한 말을 대신했다. 


지금 나는 아련하게 기억하는 젊은 시절 엄마의 삶을 살아간다. 이제는 세 아이 틈에서도 거뜬히 밥을 챙겨 먹고 식구들을 돌볼 수 있을 만큼 우뚝 선 엄마가 되었다. 어릴 적 강하고 엄하던 엄마는 한결 부드럽고 여유로운 할머니가 되었다. 이제야 깊은 주름과 흰머리 사이로 엄마의 사랑을 온전히 느낀다. 엄마의 잔소리는 여전하지만 웃으며 가볍게 흘린다. 매일 뭐 해 먹고 지내는지 걱정하며 갖은 반찬을 챙겨 주는 손길에 감사하며 너무 애쓰며 살지 말라고 툭툭 던지는 말속에 담긴 사랑을 거름 삼아 내 삶을 열심히 살아가게 된다. 


여전히 엄마와 나 사이에 다정한 재잘거림은 없다. 엄마가 걸어간 길을 온몸으로 지나는 시간이 우리 둘 사이 차곡차곡 채우며, 말없이도 진심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새해 첫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오늘은 우리 집에서 점심 먹어요!”

작가의 이전글 엄마의 손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