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기도
운동 센터는 단지 끝, 큰길 건너편에 있다. 주말이라 여유롭게 단지 입구이자 출구인 곳을 지나는데 앰뷸런스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곧 구급상자를 든 소방관이 급하게 옆을 지나서 산책로를 따라 달려갔다. 무엇을 찾고 있었고 뒷모습에서 급박함이 느껴졌다. 몇 명의 대원이 들것까지 가지고 그를 따라 다급하게 달려갔다. 소방대원들이 도착한 곳 주변에는 경찰관 몇 명이 서 있었다. 산책로를 비껴 큰 도로로 내려갔다. 목을 길게 빼고 시선은 계속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향했다. 궁금했으나 불길한 상상에 겁이 나서 근처에 가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아파트 위를 쳐다보니 활짝 열린 창문으로 빠져나와 펄럭이는 커튼이 보였다.
락커에 짐을 두고 짐에 들어갔다. 14층에 위치한 센터의 통유리창 정면에 커튼이 펄럭이는 집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으나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살피며 운동하는데 집중했고 통창 앞의 트레드 밀 위에서 작은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 걷거나 달리고 있었다. 나 혼자 운동하는 내내 시선이 자꾸 커튼으로 향해 운동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길 하나를 두고 누군가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고(아직 결과는 모르니) 누군가는 더 건강한 삶을 위해 땀을 흘린다. 장마철이라 세상이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어서인지 운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운동을 마치고 왔던 길을 돌아가는데 산책로 옆 화단에 노란 폴리스 라인이 둘러져 있다. 경찰차도 큰길 옆에 주차해 있고 경찰 몇 명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남편과 손을 잡고 아이 학교로 향했다. 자꾸 고개가 뒤로 돌아가서 애써 무심한 척해야 했다. 학교 앞에 도착하니 한 손에 요리한 샐러드를 들고 아이는 환히 손을 흔들며 교문을 나왔다. 아이와 매일 걷는 길인데 오늘따라 더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아이 손을 잡았다.
종알종알 요리하며 있었던 일을 꺼내는 아이와 길을 걷다 보니 박노해 시인이 '소년'의 모습으로 쓴 첫 자전 수필 <눈물꽃 소년>이 떠올랐다. 시인은 남도의 작은 마을 동강에서 "평이"라 불리며 가난하고 슬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등을 다독다독 쓸어주는 엄마의 손길이 다숩기만해서, 분하고 서운한 마음에 토라졌던 내가 부끄러워서, 나는 이불을 당겨 쓴 채 눈물을 삼키며"(눈물꽃 소년, p.17) 살아갈 수 있었다고 했다. 그의 곁에는 어머니뿐 아니라 할머니, 이웃 어른들, 선생님, 신부님, 친구들, 동네 형과 누나들, 첫사랑 소녀까지 수많은 손길이 머물렀다. "백지장도 맞들어야만 바위 같은 시련도 함께 맞들 수 있는 거제."(눈물꽃 소년, p.72)라는 이웃 덕분에 어려운 시절을 서로 나누고 기대며 신명 나게 살아갈 수 있었다. 먹고사는 것이 제일 큰 걱정이던 지독히 가난했던 그 시절에도 느낄 수 있었던 눈부신 희망과 따스한 숨결이 사라져 가는 것이 몹시 서글펐다.
비교와 경쟁이 만연한 세상이다. 더 잘 살기 위해 더 빨리 더 많이 채워야 한다. 너무 과열되고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 우리는 늘 초조하고 불안하다. 더더더를 외치며 내 손에 쥐고 있는 것만 바라보며 사는 세상에서 무엇이 한 인간을 숨 쉬고 영글어가게 하는지 생각한다.
평이는 감나무에 감이 붉게 읽으면 맨 꼭대기 달린 감은 따지 않았다. 옆집 담장을 넘어간 가지의 감도 따지 않았다. 새들과 옆집 아아들을 위해 남겨두었다. 평이 엄마는 잘 남겨두었다며 평이 바구니의 감이면 넉넉하다고 충분하다고 웃으셨단다. 내 아이 바구니에 튼실한 감이 가득하길 원하는 마음을 숨기기 어렵지만, 넘치도록 쌓인 감보다 바구니 속 빈 공간의 의미를 잊지 않아야겠다. 남겨둔 감 하나가 누군가의 귀한 한 끼가 되고, 남겨진 감 하나가 텅 빈 내 바구니를 채워줄 소중한 양식이 될 수 있다.
각박한 세상이라지만
꽉 쥔 손을 펼쳐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고
앞만 보고 달리는 시선을 돌려 따스한 눈빛을 나눌 수 있는
넉넉함을 잃지 않길.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고,
이만하면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너그러움을 잘 가꿔가길.
평아, 오늘 애썼는데 서운했냐아. 근디 말이다... 열심이 지나치면 욕심이 되지야. 새들도 묵어야 사니께 곡식은 좀 남겨두는 거란다. 갯벌에 꼬막도 저수지에 새뱅이도 씨 마를까 남겨두는 거제이. 머루도 개암도 산짐승들 먹게 남겨두는 거고, 동네잔치 음식도 길손들 먹고 동냥치도 먹게 남겨두는 것이제. 아깝고 좋은 것일수록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야.
평아, 사람이 말이다. 할 말 다 하고 사는 거 아니란다. 억울함도 분함도 좀 남겨두는 거제. 잘한 일도 선한 일도 다 인정받길 바라믄 안 되제. 하늘이 하실 일도 남겨두는 것이제. 하늘은 말없이 다 지켜보고 계시니께.
(눈물꽃 소년, p.16)
+) 그 후로 사고 관련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다. 사고를 당한 사람도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기를.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가족들도 아픔을 잘 견딜 수 있길. 빗소리를 들으며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