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멜로의 꽃말

무관심일까? 뒤늦게 깨달은 사랑일까?

by 눈부신 일상

여행은 늘 설렌다. 심지어 여행을 준비하는 시간과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긴 시간까지 반갑다. 가끔 이동 시간이 더 기다려질 때도 있다. 좁은 의자에 갇힌 시간이, 바쁜 일상 속에 강제로 여유를 선물 받은 것 같다. 커피 한 잔을 벗 삼아 책을 읽고 영화도 보고 그러다 슬며시 잠들 수 있는 단조로운 행동반경이 참 포근하고 풍요롭게 느껴진다.


한 해의 끝자락, 오랜만에 엄마의 생신을 핑계로 친정에 가는 길이다. 다섯 식구의 짐을 챙기는 부산함 속에서도 잊지 않고 커피를 내린다. 세 아이의 복작거림을 배경 음악 삼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펼친다. 책을 몇 장 읽다가 집중이 되지 않아서 차 창밖을 바라본다.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 안에 방금 책 속에서 흘려 읽었던 구절이 선명하게 등장한다. 곤포다!


이미 추수가 끝나서 휑한 논에 두루마리 휴지로 보이는 하얀 뭉치들이 곳곳에 쌓여있다. 곤포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책 속에 등장한 마시멜로라는 표현이 단번에 곤포를 찾을 수 있게 한다. 창밖에 보이는 하얀 뭉치를 보면서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의 주인공 해원처럼 마시멜로를 수없이 떠올리자 비로소 친정에 도착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시간 외 쉼 없이 4시간을 꼬박 달려야 하는 상당히 먼 길이었다.


마시멜로의 진짜 이름은 곤포. 하지만 아마도 여전히 마시멜로라 부르게 될 것 같다고 해원은 생각했다. -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중에서 -




대학생이 되고 부모님 곁을 떠나서 서울로 왔다. 그 당시는 부모님의 곁을 떠난다는 아쉬움보다는 꿈에 그리던 대학교에 가서 자유롭게 지낼 미래가 설렜다. 집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신나게 짐을 챙기고, 환히 웃으며 부모님께 인사를 했다. 그 설렘과 기대는 금방 사라지고 부모님의 빈자리가 점점 크게 느껴졌다.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세상에 던져지고 비로소 부모님의 든든한 울타리와 포근한 품을 알게 되었다. 가끔 허전함과 그리움이 넘쳐 감당할 수 없는 눈물이 되어 쏟아지기도 했다. 허한 마음을 채우기라도 하려는 듯 달력을 할 일로 빼곡하게 채우며, 하루하루 바쁜 삶을 이어갔다. 어느새 차를 타고 꼬박 4~5시간을 달려가야 만날 수 있는 부모님을 방문하는 횟수는 급격하게 줄었다. 점점 먼 거리에 다양한 이유까지 더해진다.


“엄마, 요즘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는데 좀 한가해지면 내려갈게요!”
“엄마, 이번 명절은 모처럼 긴 휴가니깐 여행 좀 다녀올게요!”
“엄마, 생일 파티는 연말에 내려가면 그때 같이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부모님은 단 한 번도 나의 일방적인 통보에 이견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먼 길 오느라 힘드니 집에서 푹 쉬거나, 평소에 바쁘니 긴 연휴에는 좋은 곳에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했다. 늘 자신들은 괜찮으니 나중에 찾아오라고 하면서.


이번에 친정 가는 길도 다양한 변명 앞에 한참을 망설였다. 3주 정도 후면 부모님이 서울로 이사를 오실 예정이라 앞으로 더욱 자주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코로나가 심각한 상황에서 먼 길을 이동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더 큰 이유는 아무리 친정이라도 내 집에 있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짐을 쌓고 먼 길을 이동하는 대신, 영상통화 한 번이면 엄마의 생일도 무사히 넘길 수 있다.


“엄마, 코로나도 심각하고 날씨도 너무 추워 이동하기 쉽지 않네. 곧 이사 오면 자주 볼 거니 이번엔 안 내려갈게요. 생신 축하해요! 사랑해요!”


오히려 남편이 억지로 무심한 딸의 몸을 일으켰다. 부모님이 이사하면 이제 그곳에 갈 일이 있겠냐고. 생일은 지나고 챙기는 것이 아니라고. 그래도 연말인데 부모님께 한 번 다녀오자고. 그리고 코로나 지겨우니 바람도 쐬는 기분으로 가자고. 크리스마스 전날이지만 아이들도 기꺼이 산타할아버지 대신 외할아버지를 선택했다. 그렇게 남편과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짐을 챙긴 것이다.


다행히 마지막으로 친정에 내려가는 날에 날씨는 좋았다. 겨울이지만 꽤 포근했다. 막상 몸을 움직이니 먼 길이라 지겹고 힘들다는 생각보다 마음속 깊이 해묵은 기억이 꿈틀거린다. 너무 많은 기억과 감정이 속속들이 살펴볼 수 없게 뭉쳐져 있다. 마치 들판에 쌓인 마시멜로처럼. 들판에 곤포를 스치며 친정에 다다를수록 곤포 안에서 짚이 발효되는 것처럼 내 기억과 감정도 서서히 분해된다. 그리고 이제는 날씨를 탓하지 않고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설렘과 기대가 그 공간을 대체한다.


먼 길 힘들게 내려오지 말라고, 코로나가 심각한데 안전하게 집에 있으라던 부모님은 새벽부터 마스크를 쓰고 어시장에 가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해산물을 가득 사 왔다. 두 분만 있어서 고즈넉한 집에 아이들로 생기가 돌고 경쾌함이 넘친다. 아빠는 늘 그렇듯 아이들과 함께 놀거리를 준비하고, 갈 곳을 달력에 빼곡하게 채워두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집에 갈 때까지 끊임없이 먹어도 다 먹지 못할 음식이 기다리고 있다.


“이상하게 코로나 때문인지 이사 때문인지 요즘 적적했는데, 너희들 온다고 하니 너무 좋더라. 오늘도 새벽부터 일어나서 시장에 다녀오며 너무 행복했단다. 먼 길 고생해서 내려와 주어서 고맙다.”


저녁에 와인을 한잔하며 담담하게 전하는 아빠의 말에 ‘날씨가 좋은 날’만 기다리며 핑계를 찾던 내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 늘 괜찮다고 말하지만 얼마나 우리를 기다리고 그리워하는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내 인생 페이지마다 더 많이 부모님은 등장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녀는 그의 미소를 아지랑이처럼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내 인생의 어떤 페이지에 등장했었는지 몰라 -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중에서 -




날씨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겨울은 추운 것이 당연하고, 여름에는 덥고 습한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는 매 순간의 날씨를 온전히 느끼고, 곧 다른 날씨가 찾아올 것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내 삶도 날씨 같다. 여유를 기다리는 것은 좋은 날씨만 기다리는 것과 같다. 여유로울 때를 기다린다고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할 일이 없다고 결코 여유로운 것도 아니다. 좋은 날씨는 내 선택에 달려있듯, 여유도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내 창을 가리던 나뭇잎들이 떨어져 건너편 당신의 창이 보이는' 겨울이다. 매듭달을 보내며 해오름달을 기다리는 이 시기, 나는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고 싶은 곳을 조용히 떠올려본다. 내 삶에 소중한 것 중 무책임하게 미룬 것은 무엇인지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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