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아껴 읽게 되는 [젊은 ADHD의 슬픔]
어제 고백했던 대로, 글을 적기가 어려워 읽기로 했다.
우선 읽으면 뭐라도 적을 마음이 들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시작한 책은 [젊은 ADHD의 슬픔]
제목 참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고 늘 생각해오던 책이었다.
내용은 더 좋았다.
술술 읽혔고, 읽는 동안엔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않도록 해주었다.
저 작가가 마주한 ADHD를 날것 그대로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ADHD를, 아니 정신세계(?)를 이렇게나 적나라하게 들여다봐도 되는 것일까를 잠깐 걱정했다가 이내 빠져들었다.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아래 문장을 읽고 나서였다.
읽은 이들은 알 테지만 아주 도입부이다.
고작 요만큼을 읽고 벌써 무언가 적고 싶어 진 것이다.
정신과에 편견이 있는 건 아니었는데 우울증 약까지 바리바리 타고 보니 미치광이가 된 느낌이었다.
“지음 님의 치료 목표는 남들보다 뛰어나지는 게 아니라, 딱 남들만큼만 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네.”라고 했지만 실은 참 거지 같은 목표라고 생각했다. 날고 기어 봐야 고작 평균이라면 날거나 기려는 시도 또한 무의미했다.
"네."라고 했지만 실은 참 거지 같은 목표라고 생각했다는 문장에 나는 반해버렸다.
나도 저렇게 생각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있었으나, 글로 풀어 적어볼 생각은 못해봤기 때문이다.
덕분에 앞으로 나의 "네."에는 조금 더 주저함이 없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뒤에 저 문장처럼 '실로 참 거지 같은 의견이시네요', '실로 참 쓸모없는 일을 하시려는 거군요'등의 묵음 처리시킨 사족을 붙이는 게 가능해진 덕분이다.
나는 겁이 많고 고통을 싫어해서 피가 나지 않는 방법으로만 자신을 미워할 수 있었다.
내가 너무 밉고 싫어서, 나를 구하는 게 나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고려장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깊은 밤 지게에 ADHD를 싣고 굽이굽이 산봉우리를 넘어 마침내 버릴 수 있다면, 온전해진 내가 얼마나 좋을까 싶은 것이었다.
나를 고려장하고 싶다는 문장을 떠올린 작가의 발상이 신기했다.
나로부터는 나올 수 없는 류의 문장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저자에 비하면 아주 쉬운 난이도의 세상을 살고 있구나 싶었다. 적어도 저토록 나를 미워해본 적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저자만큼 솔직하게 내 것을 드러내지는 못하는 중이니, 더 쉬운 쪽이 꼭 더 좋은 것이라고는 단언하지 못하겠다.
원래 나의 좌우명은 ‘불광불급(不狂不及)’ 혹은 ‘너에게서 나온 건 너에게로 돌아간다’였다.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한 후로 ‘미쳤다’라는 말에 기피증이 생겨 ‘불광불급’을 탈락시켰다.
‘너에게서 나온 건 너에게로 돌아간다.’
이 구절은 착하게 살자는 의미였지만 ADHD를 대입하면 지독한 뜻이 되므로 역시 지워 버렸다.
이 작품이 왜 브런치 대상을 수상했는지 알 수 있던 문장이었다.
벌써 주변에 "얼른 읽어봐"를 외치게 되는 책이다.
ADHD와 무관하게 한 인간의 생각을 이토록 재밌게 풀어낸 글이라면 누구에게도 추천할 수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이 작가에게 글을 쓰는 행위는 본인 스스로를 극복하고 삶으로 나아가는 행위이기에 이를 지켜보는 것이 더 의미 있게 느껴졌다.
이 모든 걸 전부 둘째치고 일단 재미가 있다.
오랜만에 아주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다.
오늘 읽었던 분량에서의 좋은 문장을 적어두는 것을 끝으로, 내일 2편으로 돌아와야겠다.
‘나쁘게 살았다’라는 후회는 미미해도, ‘나쁘지 않게 살 수도 있었다’라는 후회는 심각했다. 그것은 과거이자 현재였고 현실인데 환각이었다.
술 먹고 말을 놓은 사람들과 어색한 존대로 돌아갈 때마다, 우리가 인당 두 병 반 이상을 해치웠다는 사실에 놀랄 때마다 날 고소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젯밤의 내가 어땠는지는 몰라도 오늘의 나와 협의하지 않은 건 분명했다.
비상시에 먹으라는 사용법을 들으면 모든 순간을 비상시로 끌어올릴 것이었다. 규칙을 지킴으로써 규칙을 기만하는 것은 내 오랜 나쁜 습관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