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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생 Dec 03. 2022

내가 하는 정신승리

하기 싫어도 해라. 감정은 사라지고 결과만 남는다.

수험생 시절 사용하던 수첩에서 발견한 문구였다.

그 아래는 이 문장도 같이 적혀있었다.

모든 것엔 금이 가 있다. 그리고 빛은 그곳으로 들어온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를 대비해둔 문장이 분명했다.

수능에서 마주하게 되는데 설령 인생에 금 같은 결과일지라도 빛은 그곳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정신승리를 위한 문구.


어렸을 때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은 아주 타고났다.

종교 없이도 매번 나를 용서했고, 나에게만큼은 아주 관대했다.


과학 학원까지 보냈었는데, 79점짜리 과학 시험지를 들고 와 엄마 아빠에게 자랑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우리 집에서 회자된다.

진심으로 나는 79점의 과학 시험지를 자랑할만한 것으로 생각했던, 그런 아이였다.

그다지 관심 없던 과목에서 21:79라는 객관적으로 봐도 꽤나 큰 차이의 승점을 얻어냈다고 자랑까지 했던.

처음에 엄마는 '애가 나를 놀리나?' 생각했다가 아빠와 상의 끝에 나는 그런 애라는 것을 납득하셨다고 한다.

전교 2등을 하고 와도 속상해했던 오빠와 달리, 반에서 절반보다 잘하면 그 자체로 너무 만족하던 아이를 질책할 이유도 딱히 없으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다 행복하자고 하는 일인데, 나는 절반을 넘긴 등수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던 아이였으니 말이다.


만족의 역치가 낮은 건지, 나에게 무한하게 관대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덕분에 나는 사는 게 수월하다.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한 믿음이 크며, 그 선택을 만족할만한 것으로 꾸미는 일에 재능도 있는 편이다.

스스로에게 하는 가스 라이팅이랄까?

그래서 언젠가 내게 가장 많이 속은 사람이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습관 같은 정신승리를 멈추지는 못할 것 같다.

이게 내 삶을 얼마나 편하게 해 주는지 알고 있으니 말이다.

본인 안에서 누구에게도 피해 주지 않고 나를 기 살려주는 이런 정신승리를, 나는 내가 아끼는 사람들도 자주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때론 불통이고 고집쟁이라는 오명을 쓰긴 하지만, 세상의 상황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나를 지키는데 이만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내가 지켜야 한다.

내 기는 내가 살려줘야 한다.

나의 사람들도 그들을 절대 지키며 살기를 응원하며, 브런치를 끝으로 기특하게 할 일을 다 해냈다는 오늘의 마지막 정신승리를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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