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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집에서 죽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홈 스위트 홈]

by 이월생

브런치에서 도서 크리에이터라는 걸 시켜줬는데, 너무 책 이야기를 안 썼지 싶어 오랜만에 써보는 독후감.

그리고 고백하자면, 내가 오래도록 반복해서 꺼내보고 싶어 남겨두는 기록이기도 하다.


최근 읽은 소설집 중, 아니 인생에서 읽은 단편 소설집 중 가장 좋았다.


아주 많은 것을 잊으며 살아가는 중에도 고집스럽게 남아 있는 기억이 있다.
왜 남아 있는지 나조차 알 수 없는 기억들.
나의 선택으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기억이 나를 선택하여 남아 있는 것만 같다.


이런 문장들이 가득한 책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 나오는 표현들을 보고, 며칠 글을 적기 망설여졌을 정도다.

글은 경험으로 깊어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재능의 영역이라고 믿는 편이라,

엄청난 재능을 목도해 버려 의지를 잃은 느낌이었달까?


하지만 이내, 이 단편이 무려 2023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마음이 다소 편안해졌다.

일반적인 단편 소설이 아니었구나? 그럼 그렇지. 하는 기분?

이 소설의 내용에 호불호를 가질 수는 있지만, 잘 쓰인 글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인상적이다.


단편소설인, [홈 스위트 홈]이 담겨있는 책의 제목은 [쓰게 될 것].

이 책의 나머지 내용은 추후 기회가 되면 소개해보기로 하고, 오늘은 [홈스위트홈]만의 독후감을 적어본다.


우선 이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40대의 주인공이 시골 폐가를 구해 수리해 살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이야기다.

시한부를 다룬 이야기가 이토록 맑고 긍정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다.

그럼 인상적이었던 구절들을 이곳에 나눠본다.


나는 종종 과거와 미래를 헷갈리는 것만 같다.
과거의 일이라고 기억하는 상황을 현재에 그대로 겪을 때가 있으며 미래의 일을 짐작하여 이야기하면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 않느냐는 대꾸를 듣는 경험들.
인류가 동시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을 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혼란에 빠질까?
누군가는, 아주 찰나일지라도, 평생 경험한 적 없는 엄청난 자유를 실감할지도 모른다.
출생과 죽음, 성장과 노화, 발생과 소멸을 시간이란 개념 바깥에서 이해하고 싶다.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듯 바뀌어 달라지는 것. 시간을 배제하고 변화를 말할 수 있을까.
죽음 다음이 있다면, 어쩌면, 시간에서 해방된 무엇이 아닐까.


죽음을, 시간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정의한 게 기억에 남는다.

아니, 기억에 남기고 싶다.

죽음이 별게 아니라 그냥, 태어나 지금껏 따라온 시간의 흐름에서의 해방이라고 생각하면

두려움 없이, 기꺼이 그 일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나는 죽음 이후에 남을 나의 시체를 생각했다.
사람들은 시체가 마치 나인 것처럼 여기며 장례를 치르겠지.
시체는 정말 나일까? 내가 나의 시체까지 처리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백자는 흙이 될까? 그 자리에 무언가가 피어날 수도 있을까?
당신의 땅에 백자를 묻은 엄마의 마음을 나는 이해했다.
그러니 엄마 또한 내 마음을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않으려는 그 마음을 나 또한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고.


덤덤했다.

이 글의 주인공 '나'는, 어디에서 어떻게 죽을지는 내가 결정한다고 말하는 캐릭터다.

그러면서도 남겨질 엄마를 이해한다.

엄마가 저를 이해하면서, 이해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 까지도 알고 있다.

주인공의 캐릭터가 신기하지는 않았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 죽음 앞에서 조차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게 가능한 인간이라고 생각되었다.

내가 신기했던 건, 저 짧은 문장이 보여주고 있는 모녀의 관계였다.

이런 관계를 고작 저만큼의 분량에 녹여냈음에 감탄했다.


죽음은 두려웠다. 고통에 짓눌릴 때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고통을 대가로 몇 주 혹은 몇 달을 사들이는 것만 같았다.
내가 피하려고 하는 것이 고통인지 죽음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거듭되는 치료와 재발을 겪으며 강함을 다 써버렸다.
재발하지 않으리라는, 내가 좀 더 낮은 확률에 속할 수 있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믿음이 필요했다.


강함을 다 써버렸다는 표현이 놀랍게 다가온다.

강한 사람은 없구나. 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 거구나.

그리고 그 사람이 가진 강함은, 어떤 때에는 소진될 수도 있겠구나.

한번 강인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는 이유로, 애써 매 순간 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위로같이 느껴졌다.


나는 웃음을 거두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엄마는 영혼을 믿어?
두 손으로 핸들을 잡고 구부정한 자세로 한동안 정면만 바라보던 엄마가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그건 사람이 믿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야. 핸들을 부드럽게 왼쪽으로 돌리며 덧붙였다.
어쨌든 나는 반가워서 말을 걸 거야. 네 영혼이 나타나면 너무 반가워서.
돌이켜 보면, 엄마는 그때 처음 받아들인 것 같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는 말로 밀어내던 높은 확률의 미래를.
그럴 일은 없어, 엄마.
그러나 나는 엄마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두고 싶진 않았다.
나는 영혼만 남기고 갈 생각 없거든. 내 몸이 죽으면 내 영혼도 죽는 거야.
그러니까 죽은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봉헌하고 그런 거 절대 하지 마.
나쁜 년. 엄마가 말했다.
이럴 때 보면 넌 진짜 지독하게 나쁜 년이야.


주인공과 꼭 닮은 엄마 역시 강인한 사람이다.

현실을 알고, 또 받아들일 용기가 있는 사람.

네 영혼이 나타나면 너무 반가워서 말을 걸겠다는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그런 엄마의 마음이 뭔지 아는 딸은, 기어이 저 말까지 한다.

이 소설이 유독 내 마음에 와닿았던 건, 저 딸의 캐릭터가 꼭 나 같아서였는지도.

나였더라도, 내 영혼에게 말을 걸겠다는 엄마의 희망을 떠나기 전 산산이 조각내고 갔을 테니까.

그렇게 나를, 가능한 한 빨리 잊어주길, 잊지 못하더라도 떠올리며 아파하는 일만은 하지 말아 주길, 바라고 또 바랐을 테니까.


엄마, 잘 기억해. 나는 꼭 작별 인사를 남길 거야.
마지막으로 내가 한숨을 쉬면 그건 사랑한다는 뜻이야.
비명을 지르면 그건 사랑한다는 뜻이야. 간신히 내뱉는 그 어떤 단어든 사랑한다는 뜻일 거야.


이 문장이, 내게 무력감을 준 문장이었다.

세상에. 간신히 내뱉는 그 어떤 단어든, 사랑한다는 뜻이라니.

다시 봐도 감탄만 나오는 표현이다.


나는 다시 아플 수 있다. 어쩌면 나아질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탄생과 죽음은 누구나 겪는 일.
누구나 겪는다는 결과만으로 그 과정까지 공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이 소설은 마지막까지 산뜻하다.

아픈 사람의 이야기지만, 그 아픔을 조명하지 않기 때문일까?

내가 만약 주인공의 상황이라면, 다른 어떤 소설보다도 이 소설이 용기가, 위로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소설은 길지 않다.

15분 정도면 읽을 수 있는 분량?

그러니 기회가 된다면, 꼭 전문을 읽어보길 추천하며, 오늘의 독후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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