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생의, 한국에서 살아남기 #1
한국인은, 한국인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참 많았음을 말레이시아에서 머물수록 자각하게 된다.
당연한 게 많은 사회였던 이유를 생각해 보았는데, 한국은 '기준'을 공유하는 사회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결론을 냈다.
대다수의 목표의식과 옮고 좋은 것의 기준이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나이별로 당연하게 가져야 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대학 졸업장, 번듯한 직장, 애인, 가정, 투자자산, 관리된 몸, 그리고 자차와 자가 등.
'nn살이라면 가져야 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이토록 디테일하게 일치하는 사회가 또 있을까?
나는 이걸 한국인이 한국인한테 가하고 있는, 그래서 한국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겪게 되는, 사회적 가스라이팅이라고 이름하고 싶다.
개인의 삶이 위의 '평균'을 충족한다면 '기본은 했다', '할 일은 했다.'라고 평가받지만, 한 걸음이라도 벗어나면, 기준을 벗어난 선택에 대한 해명이 요구된다.
"학교 안 다녀요." "대학은 안 가려고요." "취업 안 하려고요." "결혼 안 하려고요." "연애 안 하려고요." "집 안 사려고요." 같은 말에 "왜?"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이 불러올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경고(?) 혹은 주의사항을 듣게 된다는 것 자체가 이를 반증한다.
한 번이라도 평균과 다른 선택을 해본 사람이라면 내가 왜 이 맥락에서 굳이 '해명'이라는 단어를 가져왔는지 공감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형태의 가스라이팅은 구성원 모두의 삶의 난이도를 끝도 없이 높이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심지어 모든 기준은 대체로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에 더 곤란하다.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지.'라는 당연함에 갇혀, 그렇지 못한 이들은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주저하게 된다는 점은 또 다른 제한과 압박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다들 당연하게 넘는다는 기준이라는 벽을 넘어온 사람들에겐 별다른 공치사는 없지만, 그 벽을 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그것도 안 하고 뭐 했냐’는 평가가 내려지고야 만다.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한국에서의 삶은 답지가 있는 상태에서, 그 답대로 인생을 풀어나가야 하며, 불특정 주변인들이 빨간펜을 들고 내 풀이과정을 꼼꼼하게 채점하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자존을 챙기며 너는 너대로 주관 있게 살아가라고 하는 건, 너무 개인에게 모든 걸 전가해 버리는 무책임함이 아닐까 싶다.
뭔가 '못해낸' 사람으로 취급되어버리는 이 분위기를, 왜 개인의 자존을 소모해 극복해야 할까?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높은 대로, 낮은 사람은 낮은 대로, 불필요한 자기 암시와 싸움을 끊임없이 하게 만드는 사회는 사람을 피로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이건 개인이 극복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변해야 하는 문제다.
이런 당연한 기준이 존재하는 나라와,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는 그 차이가, 한국과 말레아이시아의 현저히 다른 자살률에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로, 개인적으로 이 차이점이 크게 와닿았다. 내 삶과 일상이 평가받지 않는다는 자유로움이 이토록이나 엄청난 해방감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이, 체감하면서도 신기하다.
정해진 기준으로 평가받지 않는다는 단순한 규칙일 뿐인데 말이다.
삶이라는 게 원래 그 정도는 애쓰며 살아야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어쩌면 한국사회의 특이점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애초에 일율적인 기준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곳에서는 저마다 그냥 살고싶은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을 목격했고,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그 누구도 내 삶에 빨간펜을 들고 정답과 오답을 채점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곳의 사람들에겐 나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의 삶을, 계획을 들리는 그대로 듣기만 할 뿐이다.
어떤 기준도, 평가도 없이.
이따금,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들에겐 나도 모르게 오지랖 같은 말을 건네려 하게 될 때가 있는데, 그런 순간마다 나 역시 한국 사회 가스라이팅에 일조한 사람이었음을 실감하며 입을 닫으려고 노력한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작점인 것 같아서.
그렇기에 난 더 이상 한국 사회의 사람들이 '나로 사는 법' 같은 걸 공부하고 연습하며 또 다른 방향으로 스스로를 옥죄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딱 하나, 타인을 향한 빨간펜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향해 하고 있는 게 사회적 기준에 의한 채점인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그렇다고 생각되면 그 행동을 멈추는 것이다.
'보통' '대체로' '당연히' 같은 단어를 내 인생에서도, 남의 인생을 향해서도 빼버리는 것이다.
체감하지 못한 순간에 하게 되는 가해를 멈춰야 한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한국 사회의 가스라이팅에 그 어떤 동조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이 사회 속 당연함을 지워가는 것.
그게 우리 사회가, 구성원 모두가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는 시작점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