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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생 Sep 30. 2022

펫로스 증후군이 두려운 사람들에게

#8.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 후회를 남기지 않는 방법

어릴 적부터 나는 강아지를 무서워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는데, 아마도 언젠가 엄마가 시골 강아지한테 물릴 뻔했다는 말을 듣고 난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엄마도 나도 강아지를 무서워했으니, 내 평생 강아지와 함께 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니 처음 보는 강아지가 있었다.

누군가가 버리겠다고(?) 선언한 강아지를 어쩌지 못하고 아빠가 집에 데려온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그 작은 강아지는 보살핌이 필요한 상태였고, 가족 모두가 찬성한다면 우리 집에서 키우게 될 거라고 들었다.

이제 막 두 살이 되었다는 그 아이는 아주 촌스러운 영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사연을 들은 나는 특별히 반대를 하지도 그렇다고 반기지도 않았다.

태어나 단 한 번도 강아지를 키운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어서였을까, 그냥 우리 집에 온 아빠 손님을 보듯이 대했다.

별로 진지하게 그 아이와의 동거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꼼이는 정말 운명처럼 우리 가족이 되었다.


이미 이름이 있었지만 나는  다르게 불렀다.

사람도 영어 이름 하나 한국 이름 하나가 있으니, 그 아이에게도 한국 이름이 필요하다며.

요또로꼬미. 요꼬미. 요로로미. 꼼이 등의 명칭으로 불렀는데 어쨌든 똑똑하게도 미로 끝나면 본인을 부른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꼼이와의 일주년을 기념할 즈음, 난 일방적으로 꼼이를 엄청 좋아했다. 애써 모른척했지만 사실 꼼이는 나를 좀 귀찮아했기에 내 애정은 좀 일방적이었다.

 년이라는 시간은 꼼이가 우리 가족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리의 일상에 언제나 함께 했고, 꼼이의 모든 행동들은 우리 가족의 대화 중심 주제였다.


꼼이는 드물게 시크한 강아지였다.

불러도 쉽게 대답하지 않았고 필요한 게 있을 때만 다가왔다.

조그마한 머리 안에서 그런 계산을 한다는 게 너무 사랑스러웠다.

아침에 일어나거나 혹은 화장실을 다녀오면 간식을 달라며 냉장고 앞에서 보채기도 했고,

우리끼리 나갈 채비를 하면 자기도 데려가라며 현관 앞에 먼저 나가 있기도 했다.

혼자만 남겨두고 모두가 외출한 날에는 복수라도 하듯 거실 한복판에 소변을 봐놓곤 모른 척하기도 했다.

집에 돌아온 우리가 이게 뭐냐며 꼼이에게 물어보면 모른 척 다른 곳을 보는 모습이 귀여워 혼을 내기도 어려웠다.

우리 가족 모두 무척이나 꼼이를 사랑했다.

아마도 그 아이만큼 행복했던 팔자의 강아지는 드물 것이라 확신할 만큼 그는 넘치게 사랑받았다.


꼼이의 행복이 과거형인 이유는 그가 무지개다리를 건넜기 때문이다.

2017년 여름 엄청 더웠었던 어느 주말 저녁에 앤디는 아주 갑작스럽게 떠나버렸다.

여느 때처럼 엄마와 나는 아침에 늦잠을 잤고 그런 우리를 보채는 꼼이에게 아빠는 북엇국을 내어주었다.

(그즈음 꼼이의 기관지가 좋지 않아서 우리는 북어를 끓여주었었다.)

착하게 앉는다고 더 많이 주는 것도 아닌데 음식 앞에서 꼼이는 유난히 바른 자세로 앉아 기다리곤 했다.

그날도 그런 모습이 너무 귀여워 엄마랑 나는 꼼이만큼 귀여운 강아지는 없을 거라는 말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유난히 그날 꼼이는 내게 양배추를 달라고 보챘다.

짧은 다리로 나를 긁으며 냉장고 쪽으로 데려갔다.

평소에는 그럼에도 움직이지 않았던 내가 그날따라 양배추를 세 번이나 꺼내 주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허망하게도 꼼이는 사료를 먹다가, 기도 폐쇄 질식으로 인해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순간이었다. 떠올리는 것조차 끔찍해서 상상도 안 했던 그런 순간.

급하게 주말에도 문을 여는 동물병원을 수소문해 찾아갔지만 손을 쓸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엄마 아빠 그리고 나는 병원에서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우리의 오열을 보고 동물병원에 각자의 반려동물을 데려온 모든 이들이 따라 우는 게 느껴졌지만, 그런 것들을 신경 쓸 수 없었다.

온기를 잃어가는 꼼이를 데리고 병원을 나와 다시 집으로 갔다.

집에 가는 내내 우리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오빠도 한걸음에 달려왔다.

오빠가 집으로 들어올 때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고 반겨주었던 꼼이가 이제는 없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 다 함께 주저앉아 울었다. 정말 펑펑 울었다.

성인이 되고 그렇게나 목놓아 울었던 건 처음이었다.


우리는 그날 밤새도록 꼼이 곁에 둘러앉아 네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네가 함께한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를 말해주었다.

작은 몸에서 온기가 전부 빠져나가고, 말랑했던 아이가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 아이를 쓰다듬으며 우리에게 와주어서 고마웠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동물병원에서 세상이 떠나갈 듯 오열했던 것에 비해 우리는 생각보다 꼼이를 담담하게 보내주었다.

십 년을 함께 했지만 그 시간 속에서 후회를 남긴 적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가족 모두는 꼼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기관지가 약해졌던 마지막 몇 년간은 꼼이 혼자 집에 있었던 순간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매일 같이 함께했다.

넘치게 사랑해주었고 그 사랑을 표현했다.

본인이 사랑받는 강아지라는 걸 그도 알았을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산책할 때마다 만나는 다른 강아지들 앞에서 그렇게나 당당하게 큰 소리를 냈을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처음엔 그 아이의 부재를 실감하며 참 많이도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나온 그 시간들에서 우린 펫로스 증후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보다 담담했다는  꼼이의 부재를  년이고 슬퍼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일 ,

당시를 돌이켜보면 우리 가족은  아이 생각에 일주일 정도 식사를 차려 먹을  없었다.

뭘 만들어도 꼼이 생각이 났기 때문에 힘을 내보다가도 이내 힘이 쫙 빠져나갔다.

어떤 존재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건 그만큼이나 무력해지는 일이었다.

집에 들어오는 순간, 아침에 눈뜨는 순간 등 그 아이의 부재를 실감하는 모든 순간 무너졌다.

'괜찮아질  있을까?' 싶었지만 생각보단 괜찮 있었다.

시간이 약이었다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약이 되었던  시간보단 추억이었다. 후회를 남기지 않은 매일이 견고한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떠난 존재의 행복을 확신할  있다면, 그리워할 수는 있어도 후회에 아파하지는 않을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아이를 떠올리며 우는 날보다 웃음 짓는 날들이 많아졌다.

 아이의 새침한 행동들이 눈에 선해서.


우리는 5년이 지난 지금도 꼼이 이야기를 하고, 꼼이의 사진과 영상을 돌려본다.

여전히  작은 아이는  몸처럼 작은 몸짓으로도 우리를 웃게 한다. 행복하게  준다.

만약 정말 저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이 마치 영화 <코코> 같다면 분명 우리 꼼이는 그곳에서도 행복할 것이다.

우리가 매일 기억하고 또 추억하니까.


펫로스 증후군이 걱정된다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후회로 남을 순간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도 지금만큼 잘할 수는 없겠다' 싶을 만큼  최선을 다하는 .

그 최선의 마음을 반려동물은 모를 리가 없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아는 반려동물의 생은 만족스럽지 않았을 리가 없다.

감히 확신할 수 있다.

그렇게 먼저 떠나보낸 반려동물의 생이 나로 인해 행복했다는 걸 알고 있다면 펫로스 증후군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그립긴 하지만 적어도 후회는 없을 테니 말이다.


이 글을 적는 내내 꼼이의 모습이 그려져 혼자 자주 히죽거렸다.

우리 가족이 되어주어서 다시 한번 너무나도 고맙다는 인사를 끝으로 이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어떤 존재로든 행복하게 지내고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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