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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생 Dec 19. 2022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싶은 삶

행복.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가장 모르겠는 단어이자,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리기 조차 쉽지 않은 단어이지만,  이 단어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나중에 지금 이 순간을 내가 아주 많이 그리워하겠구나' 싶은 순간.

분명 그 순간 속에 있음에도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간다.

언젠가 내가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같은 말을 한다면, 지금이 그 문장 속의 '그때'겠구나를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여행을 가거나 특별한 날에만 이런 생각이 든다면 이 글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 같다.

아주 사소하게 밥을 먹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문득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커다란 창 밖의 하늘이 너무 푸르르면 위와 같은 생각을 한다.

가진 게 많아 이런 생각을 하는 거라면, 이를 당연하게 여길 텐데 객관적으로 나는 가진 게 많지 않다.

오히려 적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이 있긴 했지만, 중학생이었던 어느 날 살던 아파트에 빨간딱지가 덕지덕지 붙어있던 때를 시작으로, 남부러운 게 많았던 기억이 더 많이, 오래 남아있다.

 

가정집에 입장하며 신발도 안 벗었는지, 딱지가 붙어있던 집안은 흙먼지로 가득했었다.

그때는 그 빨간딱지가 내가 누리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의미인 줄도 몰랐다.

그렇게 쫓겨나듯 외곽의 작은 빌라로 이사를 갔던 게 내 가난의 시작이었다.

성적이나 친구관계 같은 건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동안 단 한 번도 내게 고민일 수 없었다.

언제 선생님이 나를 불러 행정실로부터 온 독촉장을 주실지 몰랐던 나의 학창 시절은, 그런 학생다운 고민을 하고 있기엔 너무도 현실 그 자체였다.

가난이 죄가 아니라는 말은 책 속에 존재하는 문장에 불과함을 경험했다.

가난해보니, 가난은 죄가 되더라.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살피게 만들고 배려하게 만들기에, 가난한 사람은 자주 죄를 지은 사람 마냥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일찍이 돈의 눈치를 보았던 덕분에, 내가 뭘 요구하면 안 되는지, 어떤 것을 선택하며 살아야하는지를 비교적 빨리 깨쳤다.

애매하게 어린 나이였던 나는 그 시간을 거의 전부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때때로 스스로가 가엾다.

그 시간들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위로 삼곤 하지만,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고작 15살의 아이가 그런 부분까지 단단해야 할 필요는 없었음을 알기 때문에 완전한 위안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아물지 않는 기억을 가졌음에도, 어린 나를 때때로 가여워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제목처럼 행복해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가난은 나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갔지만 결정적인 것 한 가지를 가져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딱 하나만 있어도 행복한 것, 혹은 행복해질 수 있는 것.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춰보았을 때 그건 '자존'이었다.

자존 :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

이것만 있다면 어디에서나 어떤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어떤 환경에 놓이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

당장의 현실에 버거워하는 날도 있겠지만, 그 일의 해결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내 다시 행복해진다.

미친 건가? 이 상황에 행복하다니 철이 없나?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철없이, 미친것처럼 행복하다.


"자존감을 가지세요. 나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하세요!"

이런 말을 듣는다고, 없던 자존감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누가 대신 심어줄 수도 없다.

자존감은 수학 공식을 외우거나, 요리사가 칼질을 연습하듯, 끊임없이 배우고 복습한 사람만이 지니고 살 수 있다는 어떤 작가의 말처럼 꾸준함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불공평하게도 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의식하지 않는 모든 순간들에 자존감을 익혀나간다.

나 역시 어느 정도는 그런 운 좋은 환경에 놓였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내게 준 사랑은 정말 어마어마한 것이었기에, 그런 것을 먹고 자란 내게 자존감이 부재할 수는 없었던 덕분이다.

(하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이 자존감은 나만 있는 게 아니라 나의 혈육 역시 가득이라, 이 부분은 종종 골치 아프게 작용된다. 자존감이 맥스인 둘의 의견 충돌에는, 각자가 옳다는 합의 없는 결론만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 의해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매 순간 배우고 얻어서 쌓아두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겐 끊임없는 수련으로 견고하게 다져나가야 하는 부분입니다.
네 불공평하죠.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평한 건 이 세상이 모두에게 불공평하다는 사실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요.
그런데 모순적으로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많은 것들이 굉장히 편안해집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에서 저 사람은 그냥 저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게 가능해지니까요.
저마다의 불공평함을 극복해냈을 우리 주변 모든 사람에 대한 이유 모를 인류애 같은 것도 생겨납니다.
물론 각자의 방법으로 범법을 저지르거나 타인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스스로 극복해낸 사람들에 한정해서요.
불공평함을 받아들이는 순간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도 운명도 다 다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때부턴 이미 정해져있는 내 운명안에서 최대한 행복하게 살다 갈 방법을 찾아야겠죠.
이런 일을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게 ‘자존’입니다.남들에 비해 출발부터 불공평하게 느껴져도, 주어진게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되어도 그럼에도 스스로의 운명을, 오늘을 존중하는 태도가요.

삶의 태도에 너무 공감해 필사해둔 문장이다.

특히 인정이 편안함을 가져온다는 그 부분이 내가 하는 생각과 똑같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드는 게 자존이라는 것까지, 내 경험상 저 말은 모두 맞.말.이었다.


어차피 세상은 이미 이렇다(?).

이미 이런 세상이니 그 안에서 나의 평안과 희로애락을 타협하며 사는 것이 개인적으로 행복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정신승리에 속하는 방법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라고 매 순간 나는 여기서 행복하다가 갈 예정이다.

언제 가더라도 후회 없도록, 매번 행복을 느낄 때마다, ‘이렇게 행복하다고?’를 외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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