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자실의 소녀, 아버지의 딸로 살다

by 노란민들레

나는 어릴 적, 고자실 마을 능화 고개까지 아버지를 따라 나무하러 다녔다.

아버지와 함께 짊어진 그 나뭇짐은 무거웠지만,

그 무게 속엔 따뜻한 칭찬과 웃음이 있었기에

그 시절은 오히려 즐거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나는 혼자 그 고개를 넘어 나무를 해오곤 했다.

겨울이면 소죽을 끓이기 위한 땔감이 늘 필요했기 때문이다.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먹고,

원두막에서 잠시 낮잠을 자다,

해가 지기 전에는 무성한 소풀을 베어

하루를 마무리하던 그 시절—

그것이 나의 어린 날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처녀 농군'이 아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며 공부에 대한 열망이 싹텄다.

진주여고에 가고 싶었다.

소죽을 끓이고 밥을 짓는 일은 여전히 내 몫이었지만,

시험기간이면 밤늦도록 학교에 남아 공부하다가

어머니께 야단맞는 일도 잦았다.


갈등의 연속이었다.

일과 학업 사이에서 쪼개진 마음,

그러나 그 속에서 나는 ‘시간을 아껴 쓰는 법’을 배웠다.

가난은 부끄럽지 않았지만,

무기력해지는 삶이 두려웠다.

그래서 악착같이 노력했다.


중학교 3학년 봄,

진주여고 입시를 준비하며 읍내 자취방에서 공부하던 중

아버지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싸늘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그토록 갑작스럽게 맞이해야 했다.


아버지는 고아였고, 나는 아버지의 희망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고아로 자라셨다.

그럼에도 글을 배우고, 한글을 깨우쳐

마을 구장으로 대소사를 도맡으셨다.

부지런하시고, 손재주가 좋으셨고,

무엇보다 ‘베풂’을 실천하신 분이었다.


집에 거지들이 찾아오면,

나는 두려움 속에서 먼저 인사하고,

창고방에서 쌀을 한 움큼 퍼주었다.

그런 날이면 친구들에게 손가락질도 받았지만

나는 아버지를 따라,

‘주는 삶’을 배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자랑스러워하셨다.

“우리 딸은 일도 잘하고 공부도 잘한다.”

그 말씀 하나에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다.

그리고 진주여고에 합격한 후에도

주말마다 집에 내려와 어머니를 도왔다.

공부는 늘 뒷전이었고,

월요일부터는 수업시간마다 졸음과 싸워야 했다.


그렇게 나는 고독한 아이가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마음속에는 ‘삶과 죽음’이라는 화두가 머무르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 그 경계 위에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고혈압 때문이었을까,

송아지 분만에 무리를 해서였을까—

그 이유는 끝내 알 수 없지만

나는 지금도 그날 이후의 세월을 곱씹으며 살아간다.


삶은 늘 벼랑 끝처럼 아슬아슬했고,

죽음은 예고 없이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문제를 되새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떠날 것인가’를.


우리 모두는 **무상(無常)**한 길 위에 놓여 있다.

살고, 늙고, 병들고, 마침내 죽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짧은 여정 속에 어떤 사랑과 기억을 남기느냐이다.


아버지처럼 말이다.

묵묵히 가족을 위해 일하고,

동네를 위해 봉사하며,

조용히 사라졌지만

딸의 가슴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따뜻한 이름으로 남은 사람.



이제는 나도, 떠남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언젠가 나도, 다 내려놓고 아버지처럼 훌쩍 떠날 날이 오겠지.”

그날이 오면,

아이들은 또 나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조금 더 부지런히 살고,

조금 더 따뜻하게 나누고,

조금 더 많이 웃으려 한다.


아버지가 내게 그랬듯,

나도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