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하느니만 못한 게 있다. 말이다. 특히 진심이라는 함정을 뒤집어쓴 말만큼 해로운 게 없다.
"너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데…."
"기분 나빠 하지 말고 들어" 만큼 오싹해지는 말이다. 호의와 진심의 가면을 쓴 조언에는 본심이 숨어 있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당신을 위해 기꺼이 조언한다는 당위성.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하고 생각한다면 상대방이 원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맞다. 정작 상대방은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데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 와 닿기나 할까.
"나는 더 힘들었어"
고통에 층위가 있을까. 아니, 우선 완벽한 공감이라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경험한다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겪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경험을 남들에게 그대로 옮길 수도 없다. 설령 동일한 경험이라고 해도 느끼는 바가 다르다. 결국 내가 아니기에 남의 아픔이나 절망은 편편하고 납작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내가 거쳐온 경험이라도 그 일이 타인의 현재라면 희뿌연 장막이라도 덧씌운 듯 멀게만 느껴진다. 진심 어린 축하도 어렵지만 위로는 더 까다롭다. 내가 느끼는 게 아니니까.
"그러게 왜 그랬니"
가까운 사람, 아끼는 사람일수록 질책과 충고부터 튀어나온다. 공감은 한참 뒤에 서 있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 앞에서 질책은 의미가 없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고민은 충분한 공감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섣부른 질책은 ‘우리’ 사이에 깊고 진한 선을 그을 뿐이다.
진심이라는 말 만큼 그럴듯한 단어가 또 있을까. 따뜻한 척, 달콤한 척 비겁해지기도 쉬운 말이다. 가짜가 아닌 진짜 진심을 담는다면 지금 당장 하고 싶은 말은 잠시 아껴두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