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블로그 '전문상담사 잇슈' : 이해하기
반고흐 전시회에 다녀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치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한 걸음 뒤에서 자율 관람을 하고 있었다.
나의 어깨 정도 올 듯한 여자아이 하나가 내 발을 콱하니 밟았다.
그 생생한 통증에 결국 내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나갔다.
아이는 자기 엄마의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와 아이의 엄마가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내 고통은 그들의 귓가에 들릴 정도였지만,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끝내려 하였다.
결국 먼저 아쉬운 목소리를 내는 건 또다시 나여야 했다.
조용한 장소니까, 감정은 빼고 간결하게.
‘사과해야지.’
아이는 잠시 나를 올려다봤고, 아이 엄마는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내 말을 그대로 따라 말하고는 아이가 사과하는 걸 지켜봤다.
사라지는 뒷모습에서도 아이 엄마의 웃음이 가시지 않은 게 보였다.
아이 엄마의 그런 반응을 보며
아이의 그 반응의 이유가
아이 엄마의 정서 기능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눈치챘지만,
구태여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에 적절한 감정 표현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마음에 깊은 병이 자리했다는 증거니까.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모는 아이의 역(逆) 거울이다.
외출 전에는 누구나
거울을 보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단장한 후
바깥으로 나오듯이
아이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믿은 후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얼룩진 거울을 보며 자라난 아이들은
자신의 진짜 얼굴은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기에
타인이 자기에게 ‘너 얼굴에 뭐 묻었어.’라고 지적할 만한 상태로
무엇이 잘못된지도 모른 채 집 밖으로 던져진다.
결국, 훗날 자신의 아이를
세상의 모진 날들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것도
부모의 그늘이 크고 넓을수록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의 말과 행동을 보면
그 너머로 부모의 잔상이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것처럼
부모를 보면, 그 아이의 미래도 아련히 그려진다.
아이는 부모의 오늘이고, 부모는 아이의 내일이기에
부모라는 이름의 무게가 더욱 버겁게 느껴지는 것도 같다.
비록, 나는 그들과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겠지만
그들의 평안을 기원한다.
*사진 출처: iStock 무료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