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블로그 '전문상담사 잇슈' : 이해하기
이천 이십 삼 년 삼월 십일
새벽 다섯 시 삼분
나의 외할머니와 사별한 순간이다.
나의 부모님은 나와 나의 형제가 어렸을 때부터
종종, 외할머니 댁에 우리를 맡긴 후
부부만의 여행을 다니곤 하셨다.
그리고 학교 소풍에 보호자가 필요할 때도
나는 둘째였기 때문에
어머니보다는 외할머니와 더
함께한 시간이 많았다.
어렸을 적에는
외할머니 댁에서 잠을 자려고 할 때면
워낙 시골 마을이다 보니,
천장 위에서 쥐들이 노니는 소리도 듣고는 했는데
까만 밤
그들이 노닥노닥하는 소리를
나의 벗 삼아,
어린 마음에
언젠가는 할머니가 나보다 먼저 죽겠지
라는 생각을 퍼뜩 떠올리는 동시에
혼자 눈물을 훔치며
조용히 내 옆에서 먼저 잠이 든
외할머니 얼굴을 한 번 바라본 뒤
나도 그녀를 따라
잠이 들기 위해 노력하고는 했다.
그렇게나 두려웠다.
아주 옛날부터
그녀와의 이별이.
나의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그녀는 지혜로웠기에
자신의 딸, 즉 나의 어머니가 결혼하고 난 뒤
어머니의 첫 생일날
직접 우리 집을 방문하여
손수 자신의 딸의 생일상을 차리셨다고 한다.
그에 아버지가
아유 무슨 잔치가 있냐고 물으니
응 우리 딸 생일이야,라는 한 마디로
아버지의 입을 다물게 만드시고는
그 후 아버지가 필히,
매년 어머니의 생일을 직접 챙기게 만들었노라고
무용담과도 같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리고 나의 형제도
크리스마스 날, 그 오지마을인 시골에서,
자신보다 훨씬 큰 소나무 하나를 베어
등에 업고 우리 집까지 왔던
외할머니의 크리스마스트리 배달에 대해
놀라웠노라 이야기하고는 했다.
그때마다 나의 외할머니는
환하게 웃고 계셨을 뿐이라며
어머니도 형제도 같은 말로
그 이야기의 끝을 마무리 짓고는 했다.
그렇게 그녀는 놀라웠고
현명했으며,
누구보다 온전한 형태로
자신의 가족과 소중한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이였다고,
나는 그리 기억하고 있다.
내 안에 이루어진
온전한 사랑의 형태는
결국 모두 그녀로부터
나에게로 왔던 것이기에
내 사랑이 떠나던 날
그 후 몇 개월을
또 지금까지도
그 큰 빈자리를
종종 눈물로 채우고는 한다.
그녀의 존재를 한 없이 투명하게
재탄생시키려는 듯 말이다.
살아오며,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그 누구 하나, 내 곁을 떠나더라도
그리운 이 하나 없었지만.
내 삶의 유일한
그리움의 이름은
외할머니, 당신이라고.
올해의 봄이 떠나기 전
고백해 본다.
당신이 떠난 그 봄에 남아,
*제목 사진 출처: iStock 무료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