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완 Dec 06. 2022

안전운임제가 최선일까요?

파업을 지지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안전운임제는 어딘가 이상합니다. 안전운임제 지지자는 화물 노동자가 과로, 과적, 과속하지 않으려면 일정 운임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여기에는 납득하기 힘든 전제가 있습니다. 돈을 더 주면 무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발상도 의심스럽지만, 화물 노동자가 어떤 상황에서든 평생 화물차로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큰 문제입니다.

운임이 너무 낮아지면 화물 노동자가 다른 생계 수단을 찾도록 돕는 방안도 있지만, 안전운임제 지지자는 오로지 화물 노동자가 화물차만 몰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휴식 시간 보장이나 과적 단속처럼 실제로 안전과 직결되는 제도를 놔두고, 시장 상황과 무관하게 가격을 보장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전제가 나쁘니, 결론도 멀쩡할 수 없습니다.

운송업은 진입장벽이 매우 낮습니다. 특별한 장애가 있지 않다면, 누구나 대형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습니다. 대형 운전면허가 있다면, 거대한 화물차를 모는 일도 금방 익힐 수 있습니다. 운전은 학위나 연령도 요구하지 않아서, 누구나 언제든 운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화물 노동자는 언제나 과잉경쟁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과잉경쟁으로부터 화물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우선 정부는 자격증을 발급해서 진입장벽을 높혔습니다. 하지만 진입장벽을 무한정 높힐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진입장벽이 너무 높아지면, 역으로 화물 노동자가 지나치게 협상력을 갖게 됩니다. 노동자가 지나치게 협상력을 갖게 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 대중에게 전가됩니다. 임금이 끝없이 오르며 소비자 물가를 폭등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70년대에 영국이 비슷한 곤경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입장벽이 가장 높은 직업인 의사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엄격하게 견제받습니다. 높은 진입장벽 덕에 지위를 보장받지만, 그 대신 정부기관으로부터 가격 협상력을 철저히 통제받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의료시장은 의사의 숫자부터 서비스 가격까지 정부가 관리하는 준계획경제체제인 셈입니다.

하지만, 화물 노동자를 견제하는 기관은 따로 없습니다. 노동자를 직접 통제하는 기관 따위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진입장벽을 더 높힐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바로 '안전운임제'입니다. 정부가 운송업계에서도 경쟁을 억제하는 동시에 가격을 통제할 수는 없으니, 대신 일정 운임을 지급할 의무를 기업인에게 부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부에 충분한 예산과 권한이 없으니, 대신 기업인에게 화물 노동자의 생계를 책임지게 하자는 셈입니다.

문제는 경제가 위험할 때에는 안전운임제를 포함한 모든 가격 통제가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주요 선진국이 만년 저성장 상태에 진입했습니다. 성장률이 낮아졌다는 말은 그만큼 사람들이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부가가치가 적게 창출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기업인과 노동자가 나눠 가질 파이 자체가 줄었다는 말입니다. 파이가 줄어든 상황에서 정부가 노동자의 몫만 보장한다면, 산업 전체가 위축될 수 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기업인의 몫만 줄어드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면, 기업인은 살기 위해 사업을 접거나 고용을 줄일 수 밖에 없습니다. 노동자의 안정성을 위해 기업인의 유연성을 포기한 대가는 공멸인 셈입니다.

노련한 복지 선진국은 안정성과 유연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유연안정성' 개념이 이런 고심의 결과물입니다. 복지 선진국 정부는 노동자의 협상력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에게 충분한 실업급여와 함께 직업 교육을 지원해서 다른 대안을 고를 기회를 보장합니다. 이런 유연안정성을 가장 잘 발달시킨 나라가 바로 덴마크입니다. 덴마크는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시장경제와 함께 가장 관대한 실업급여를 자랑합니다. 덕분에, 덴마크는 그 어느 나라보다 위기에 강합니다.

안전운임제의 대전재는 '평생 직업'이라는 오랜 꿈입니다. 하지만, 평생 직업은 몰락하고 있습니다. 어렵게 대기업에 합격해도 4, 50대에 물러나는 일이 흔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함께 고통을 분담하기에는 노사 관계가 너무 험악합니다. 고용안정은 노사가 화목하게 고통을 분담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경제 상황이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직업은 분업입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직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직업이 버티고 있다면 누군가가 억지로 부양하고 있다는 의미 밖에 안 됩니다.

왜 화물 노동자는 화물차만 몰아야 할까요? 화물 운임이 너무 낮다면, 적절한 실업급여를 받으며 다른 직업을 준비하면 안 되는 걸까요? 노동조합은 안전운임제 같은 사이비 대증요법이 아니라, 적극적 노동정책 같은 검증된 치료법을 요구하면 안 되는 걸까요?

운송업은 사향 산업입니다. 인공지능이 모든 직업을 대체할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지만, 인공지능이 단기간에 대체할 수 있고 실제로 빠르게 대체하고 있는 영역이 바로 운전입니다. 중요 인물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고급 운전자를 제외하면, 운전 노동의 수요는 언젠가 폭락할 것입니다. 노동 수요는 줄어드는데 공급이 그대로라면, 고작 안전운임제로 화물 노동자를 보호할 수는 없습니다. 애초에 교환 자체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가격 통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안전운임제는 편향된 임시 방편일 수 밖에 없는 셈입니다.

물론, 지금 벌어지고 있는 파업은 허약한 안전망과 노동자의 낮은 협상력 등 고질적인 문제 탓에 나타난 사회적 증상입니다. 우리나라 노동자는 경쟁을 강요받을 뿐, 안전망을 보장받지는 못했습니다. 진보 정부가 집권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진보 정부가 더 가혹하게 나올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전운임제가 타당하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안전운임제는 효과적인 친노동 정책도 아니고, 사회주의 정책도 아닙니다. 평생 직장을 지키고 싶은 이익 집단의 고집일 뿐입니다.

화물연대의 파업을 지지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유연하지 않은 가격통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 기댈 수 있는, 튼튼한 사회안전망입니다. 화물연대는 안전운임제가 아니라 적극적 노동정책을 요구해야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안전운임제 갈등의 이면에는 정부가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