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뉴스를 보며 고통받는 이유
정치에도 철학이 있다는 점을 잊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한 쪽은 정치라는 단어만 봐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다른 한 쪽은 정치에 과몰입해서 가족, 친구, 타인 가리지 않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 다툰다. 주로 다른 한 쪽 탓에 방송계와 인터넷에서는 정치와 엮이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하는 풍조가 퍼졌다. 오죽하면 다른 한 쪽을 '정치병자'라고 부를까.
많은 사람이 정치 문제를 두고 시도 때도 없이 갈등하는데, 막상 그 내용을 뜯어보면 공허하다. 다른 정치인, 정당,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을 향한 모욕만 가득하고, 좋은 정부란 무엇인지, 자유, 평등, 공정 등이 무슨 의미인지, 정부가 그 중에서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돈된 논의는 거의 없다. 심지어 직업 정치인도 중도실용이나 탈이념을 내세우며 이런 경향에 편승하고 있다. 정치는 넘치는데, 정치철학은 바닥을 드러냈다.
정치철학 없는 정치는 윤리 없는 인생이나 마찬가지다. 정치철학은 광범위한 학문이지만, 대체로 정부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어떤 정책을 골라야 하는지를 다룬다. 자칭 탈이념 정치인은 국민에게 필요한 정책을 과학적으로 찾으면 된다는 듯이 이야기하지만, 그 정책이 정말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지, 애초에 무엇이 국민의 이익인지 따지는 일은 정치철학의 영역이다. 다시 말해, 정치철학 없이 정책만 논의하겠다는 말은 근거와 목적 없이 정책을 고르겠다는 뜻이다. 이게 생각 없이 사는 인생과 어디가 다를까.
정치철학이 부족하면 정치인도 무능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수주의가 시장 자유주의, 작은 정부론의 대명사처럼 통한다. 서구에서는 보수주의자도 시장에 적극 개입하는 정부를 만들었지만, 우리나라 보수주의자에게 그런 선택지 따위는 없다. 좁은 보수주의에 갇혀 있으니, 경제학자들이 확장 재정과 증세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할 때에도 보수주의자는 긴축 재정과 감세를 고집할 수 밖에 없다. 진보주의자도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 진보주의자는 약자 보호와 남북 평화에만 집착한 탓에 공정성이나 안보 불안을 신경쓰지 않을 때가 많다. 보수도 진보도 어느 순간부터 자리잡은 통념에 갇힌 탓에 문제에 대응할 힘을 잃은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가 고령화나 자살 등 여러 중요한 문제를 방치한 것도 정치인이 정치철학 없이 마구잡이로 정책을 골랐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일관성 있는 정치철학 없이 당장 선거에서 이기는 데에 도움될 법한 정책만 찾아다닌 탓에, 정부는 눈 앞에 있는 여론에만 주목하고 장기적인 전망에 신경쓰지 않았다. 물론 정부 관료와 국책 연구기관 연구원은 멀리 보고 큰 문제를 예견해 왔다. 실지로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온갖 보고서가 가득하다. 단지 결정권을 가진 정치인이 깊이 없는 정쟁에만 집중하느라 큰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뿐이다.
멀리 보는 선진국은 정치철학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느 곳보다 정치철학에 진심이다. 유럽의 정당 이름을 보면 거의 다 어떤 정치철학을 드러낸다. 노동당, 보수당, 사회민주당, 자유당, 공산당 등 유럽 정당은 거의 다 이념 결사체다. 흔히 중도실용 정치인으로 통하는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과 독일의 메르켈 총리도 그 속을 보면 특정 정치철학에 충실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시장 자유주의에, 메르켈 총리는 독일 특유의 기독교 민주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중도실용도 우리나라에서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을 뿐, 역시 일종의 정치철학이다. 적어도 선진국 중에서 정치철학 없는 정치인이 성공하는 곳은 거의 없다.
우리나라 정치 철학은 빈곤하다. 훌륭한 정치철학자가 많지만, 구름 위 학계에서 논쟁을 벌일 뿐 지상에는 힘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포퓰리즘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우리나라 정치는 삼김시대 이래로 포퓰리즘과 멀어진 적이 없다. 삼김시대 정치인은 나름의 정치철학에 따라 권력을 행사했지만, 이후 정치인은 표심만 의식하며 일회용 담론만 양산했다. 이게 포퓰리즘이 아니면 무엇일까. 포퓰리즘을 걱정하면서 정치철학에 무관심하다면 모순이다. 우리가 뉴스를 보며 고통받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좋은 정부가 무엇인지 깊이 논의한 적 없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