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분별하게 권위를 밀어낸 대가
호랑이 없는 곳에서는 여우가 왕이다
산업화 시대는 권위적이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지도해야 했고, 아랫사람은 따라야 했다. 대표적으로, 아버지와 선생님은 종아리에 피멍이 나도록 청소년을 때릴 '의무'가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동네 어른도 밑에 있는 사람을 이끌어야 할 책임을 짊어졌다. 온정적인 어른은 아랫사람 버릇을 망치고 사회를 위험에 빠뜨린다며 비난받았다. 윗사람의 훈육에 저항하는 아랫사람은 사회성이 없다며 배척당했다. 이런 식으로, 옛날 사람은 일상 속에서 폭력을 동반한 훈육을 통해 규범을 유지했다.
큰 권력은 자연히 부패했다. 힘 있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경계가 너무 뚜렸했던 탓에, 윗사람이 나쁜 짓을 해도 아랫사람은 저항할 수 없었다. 윗사람 사이에서는 실권을 잃은 윗사람을 무시하고 아랫사람을 착취하는 풍조가 퍼졌다. 아버지는 돈을 벌어 준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자녀를 때렸고, 선생님은 부모 대신 아이들을 훈육한다는 이유로 돈과 선물을 요구했다. 모든 윗사람이 왕도를 걷지는 않으면서 왕처럼 행동했다. 유교 정신은 사라지고, 틀만 남았다. 그것도 뒤틀린 채로.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정치를 넘어 일상에서도 탈권위주의가 퍼져나갔다. 그 덕에, 과거에 비하면 아버지라는 이유로, 선생님이라는 이유로, 직장상사라는 이유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막대하기 어렵다. 물론 곳곳에 과거의 잔재가 진하게 남아있지만, 적어도 윗사람의 폭력을 사회적으로 비난하는 풍조가 자리잡았다. 윗사람의 폭력을 고발하면 역으로 비난받던 상황에서 벗어난 것 만해도 큰 변화다. 윗사람은 부패한 대가로 눈치를 보며 살게 되었고, 아랫사람은 과거에 누릴 수 없던 자유를 얻었다.
그렇다고 좋은 사회가 온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부당한 권위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사회 전반을 지탱하는 데에 필요한 권위까지 흔들어 놓았다. 부모는 자녀가 잘못해도 혼내지 않는다. 교사는 학생이 수업을 방해해도 통제할 수 없다. 경찰은 범죄자가 거리를 활보해도 함부로 제압하기 어렵다. 정부기관은 지역사회나 공론장에서 목소리 큰 사람이 공익을 해치는 정책을 요구해도 거부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책임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책임은 있는데 권한은 없는 기형적이고 비효율적인 구조가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탈권위주의는 실패했다. 부패한 윗사람을 끌어내렸으면 더 뛰어난 윗사람을 찾아야 했지만, 우리 사회는 누구도 위에 서기 힘든 상황을 만들었다. 마치 프랑스 혁명이 옛 질서를 무너뜨려놓고 새 질서를 세우는 데에는 실패한 것처럼, 탈권위주의 풍조는 필요한 권위마저 파괴했다. 심지어 우리나라 탈권위주의는 프랑스 혁명처럼 구태를 철저히 쓸어내지도 않았다. 불리할 때에는 탈권위를 외치고, 유리할 때에는 권위를 앞세우는 사람을 억제하지 못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부당한 권위에서 벗어나는 일도 어중간하고, 권위가 필요한 곳에서 권위가 기능하는 일도 어중간하다. 탈권위주의는 더 나은 질서가 아니라 혼돈을 부른 셈이다.
프랑스의 위대한 선지자, 앙리 생시몽은 프랑스 혁명이 일을 마무리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썩은 피라미드를 무너뜨렸다면 그 폐허 위에 더 합리적이고 능률적인 피라미드를 쌓아야 했는데, 혁명가들이 그런 마무리 작업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생시몽이 탈권위와 권위가 다투는 우리나라 모습을 본다면 똑같이 이야기할 것 같다.
모든 권위가 사라져도 사람이 알아서 잘 할 것이라고 믿었는지 어쨌는지, 탈권위주의를 외치는 사람은 더 나은 권위를 찾는 일에 무관심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권위적인 면을 내려놓지 않았다.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는 여우가 왕이다. 우리는 호랑이를 무분별하게 사냥한 대가로 여우 같은 사람들에게 일상을 위협받게 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나은 호랑이다. 판단력 있고, 분별력 있고, 절제력 있는 호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