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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Aug 10. 2023

좋은 의도가 자폐인을 위협한다

'차별'은 문제해결에 도움되지 않는다

주호민 작가 덕에 자폐인과 비자폐인의 공존 문제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자폐인과 비자폐인이 함께 수업을 듣는 교실에서, 주호민 작가의 아들은 여러 여학생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이 사실을 접한 일부는 자폐인 학생을 비자폐인 학생과 분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자폐인과 공존하는 법을 배우기 이전에, 비자폐인도 무사히 수업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주장을 차별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지금 통합교실에서는 차별과 평등이 아니라. 권리와 권리가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자폐인은 비자폐인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럴 권리가 있다. 근대적인 국가에서 모든 사람은 똑같이 법으로부터 보호받고,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고, 똑같이 기회를 누려야 한다. 누구도 개인이 선택하기 어려운 특성 때문에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여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흑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범죄자의 자녀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르게 대우받아서는 안 된다. 기본 가치에 예외는 없다. 자폐인도 남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하고, 자폐 때문에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자폐인도 사람이고, 자폐는 선택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자폐인이 타인과 공존할 권리가 도출된다. 보호자가 없거나 상태가 심각해서 밖에서 생활하기 힘든 경우가 아니라면, 자폐인을 사회에서 분리해서는 안 된다. 무분별한 분리는 평등한 권리라는 근대 국가의 기본 가치에 위배된다.

물론 기본이라고 해서 쉽다는 뜻은 아니다. 자폐인과 비자폐인은 너무 달라서 함께 살기 힘들 수 있다. 일부 자폐인은 돌발적으로 행동한다. 뜬금없이 소리를 지른다거나, 박수를 친다거나, 주변 물건을 부순다. 때로는 비자폐인이 그랬다면 크게 처벌받았을지도 모를 행동을 악의 없이 저지를 수 있다. 실제로 자폐인의 악의 없는 행동 때문에 크게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종종 있다.

간혹 자폐인도 똑같이 처벌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폐인에게 법적인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자폐인의 돌발 행동은 어떤 목적이나 동기에 따른 것이 아니라 무릎을 때리면 다리가 들리는 것과 같은 자동반사에 가깝다. 자폐인은 매우 예민하다. 똑같은 수준의 생활소음도 재난영화 효과음처럼 들을 수 있고, 똑같은 밝기의 네온사인도 코 앞에서 산불이 난 것처럼 볼 수 있다. 자폐인은 평범한 사람도 견디기 힘든 환경에서 사는 셈이다. 자폐인의 돌발 행동은 넘치는 자극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피해를 본 사람에게는 폭력이겠지만, 자폐인에게는 불가항력일 수도 있는 셈이다.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었다고 하더라도, 사고의 원인이 자동차의 급발진이라면 운전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자폐인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비자폐인에게 일방적으로 참고 견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폐인에게 비자폐인과 함께 살 권리가 있다면, 비자폐인에게는 자신을 지킬 권리가 있다. 개인의 안전은 국가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가장 기초적인 권리다. 형이니까 동생에게 양보하라는 식으로 비자폐인에게 자폐인의 권리를 우선시할 것을 요구한다면, 자폐인을 향한 혐오가 비인간적인 정책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 누구도 애착을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봉사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는다. 일방적인 희생은 사람의 공정성 감각을 자극할 수 있다. 경제상황이 악화된다면, 공정성 감각이 예민해져서 자폐인을 향한 분노로 커질 수 있다. 역사를 보면 이런 퇴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비자폐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대책 없이 자폐인의 권리를 우선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럴 때 통계를 근거로 내세워서 자폐인의 권리를 옹호한다면 역효과가 날 것이다. 사람은 통계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음주운전자 때문에 죽을 가능성보다 자폐인 때문에 다칠 가능성이 낮다고 하더라도, 비자폐인은 자폐인의 돌발행동을 더 걱정할 수 있다. 자폐인 대부분이 실제로는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도, 뇌가 사실에 따라주지 않을 수 있다. 자폐인의 돌발행동 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비자페인의 불안감 역시 어느정도는 불가항력이다. 무작정 통계를 들이밀며 불안해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은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셈이다.

자폐인과 비자폐인의 갈등은 권리와 권리가 충돌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렇다면 두 권리를 동시에 챙길 방법을 찾거나 눈물을 머금고 어느 한 쪽에 희생을 강요해야 한다. 마땅한 대책이 없다면, 맹목적으로 비자폐인과 자폐인을 한 곳에서 생활하게 하기 보다 일부 공간에서는 둘을 분리하는 편이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평등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교실에 자폐인의 돌발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비자폐인의 권리를 위해 자폐인이 특수교실이나 특수학교에서만 수업을 받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다고 해서 자폐인이 사회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는 사회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다.

물론 사회가 가진 역량을 키워서 보다 평등한 대안을 고를 수도 있다. 만약 교사의 전문성을 높이는 동시에 교사 한 사람 당 학생 수를 극적으로 줄일 수 있다면, 비자폐인과 자폐인이 한 교실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둘을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의 가장 큰 이유가 안전인데, 전문성 있고 담당하는 학생 수가 적은 교사는 자폐인을 적절히 관리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통합학교에 한해서 한 교실 안에 가르치는 교사 한 사람과 수업 태도를 단속하고 어려운 학생을 돕는 교사 한 사람을 동시에 배치할 수 있다. 그만큼 비용이 들겠지만, 이런 방법 역시 정부가 경제상황과 사회적 연대 수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어느 쪽을 고르든, 우선 실현 가능한 대안을 찾기 위해 건설적으로 대화해야 한다. 이 문제에 완벽한 정답은 없다. 사회가 역량과 가치관에 맞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지금은 ‘차별’ 한 단어 때문에 대화가 진행이 안 된다. 비관적인 현실주의자가 더 나은 대안을 고민하지 않고 자폐인의 권리를 희생시키려 한다는 점은 분명 문제이지만, 이상적인 평등주의자가 비자폐인의 권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도 충분히 문제다. 그렇게 소모적인 갈등에 휘말리는 동안 가장 고통받는 건 자폐인과 그 가족이다. 정말 평등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내 정의감에 취해서 아무거나 차별이라고 부르기 전에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 어쩌면, 차별 한 마디로 논쟁을 끝내려는 평등주의자는 평등의 숨은 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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