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완 Aug 19. 2023

요즘 애들에 대해 얼마나 아시나요.

꼰대는 욕 먹는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물어보면 대답할 자신이 없다. 모든 시간을 알뜰하게 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에도 공부한 시간보다 자는 시간, 친구와 통화하며 위로받는 시간이 더 많았다. 나도 게으른 내 자신이 너무 미웠다. 자살에 실패하고 나서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따라다닐 만큼, 자신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해서 괴로웠다.


자책은 도움되지 않았다. 대신 내가 삶에 의욕을 갖게 된 시기는 불안장애 약을 반 년 이상 먹고, 집안 경제가 안정되고, 수 년 동안 여러 책 읽으며 혼자 연습한 인지행동치료 기법에 익숙해진 다음이었다. 상황이 변해서 나도 변했다면, 과거에 마음 속으로 괴로워하며 드러누운 것도 순전히 내가 게으른 탓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대체로 사람은 가난이나 고도비만 탓에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 당사자를 탓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적으로 관찰해 보면 상황의 힘 탓에 사람마다 다르게 행동하고 생각한다는 점이 선명히 보이지만, 나도 모르게 구체적인 원인에 눈이 가는 셈이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문제가 생기면 상황이 아니라 개인부터 탓하는 버릇을 '귀인 오류'라고 부른다.


우리 주변에는 귀인 오류에 빠진 사람이 많다. 특히 자기 힘으로 고난을 극복했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귀인 오류에 잘 빠진다. 그런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뻔하다. '나는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는데 너는 왜 못 하냐.' 타인의 처지를 충분히 생각하지 않으니, 자연히 타인의 노력이나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단정하게 된다. 상황에 발목 잡혀 있을 뿐일 수도 있지만, 자기 성찰도 심리학적 지식도 없는 사람의 눈에는 당장 찾기 쉬운 개인만 보이는 것이다  


'요즘 애들은 열정이 없어' 같은 한탄도 대체로 귀인 오류다. 확실히 요즘 애들은 일에 도전하기 전에 보상을 약속받고 싶어하고, 보상이 모호하면 아무리 근로시간이 짧고 좋은 직장상사가 있는 걸 알아도 일하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어렵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놓고 몇 년 만에 관두거나 아예 취업을 포기해 버리는 청년이 많다. 이런 현상이 청년의 열정 부족 탓에 일어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약간의 위험도 감수할 수 없는 상황에 익숙한 탓에, 청년은 나름 합리적으로 자기를 방어하고 있을 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한 사람이 다양한 관계망에 속해서 현금이나 일자리 등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다음 달에 월세를 못 낼 거 같으면 형제나 친척에게 돈을 빌릴 수 있었고, 학교나 직장 선배를 통해 일자리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같은 관계망 안에서 여유가 없는 사람을 도울 암묵적인 의무가 있었고, 도움받은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되갚을 의무가 있었다. 이렇게 어느정도 강제력이 있는 '비공식 복지' 덕에, 우리나라는 사회보장제도를 키우지 않았어도 사회가 바닥까지 망가지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은 관계망이 붕괴하고 있다. 경제가 흔들리고 격차가 벌어진 탓에, 충분히 의지할 수 있는 친척이나 인맥을 둔 사람이 줄고 있다. 물론 사회통합실태조사 같은 자료를 보면 위험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응답하는 사람이 근소하게 늘고 있다. 하지만 이 조사는 각자가 속한 관계망이 얼마나 부유한지 고려하지 않는다. 모두가 모두를 충분히 도울 만큼 여유롭지는 않다. 주변인에게 도움받을 수 있다고 해도, 그 주변인의 소득 수준에 따라서 실제로 각자가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와 '실제로 얼마까지 도움받을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인 셈이다.


요즘 청년은 과거보다 좁아진 관계망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자연히, 무엇이든 직계 부모에게 의존하거나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사회가 불안정해진 탓에 관계망이 붕괴했고, 관계망이 붕괴한 만큼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하지도 않은 탓에, 청년은 불안정함에 익숙해지고 있다.


불안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방어적으로 행동한다. 장기적인 이익이 확실하지 않으니, 당장의 손실을 줄이는 데에 주의력이 쏠리게 되는 것이다. 요즘 청년이 함부로 중소기업에 뛰어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소기업에 들어간다고 해서 처지를 개선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데, 일하다가 몸과 마음을 다치면 완전히 혼자가 될 가능성은 매우 크다.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의 시선에서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이 이익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런 사고의 흐름은 개인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랬으면 정신의학이나 상담심리학은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드러누운 청년은 '사회문제'다. 보수 - 진보할 것 없이 신속하게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놓고 충분히 대책을 세우지 않은 탓에 벌어진 사회적 참사다. 심지어 국회에서 일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청년 당사자조차도 청년이 사회문제에 빠졌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청년 자살, 니트, 비혼주의가 확산되지 않으면 이상한 상황인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열정을 갖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비합리적이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좋은 의도가 자폐인을 위협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