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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Aug 20. 2023

때로는 여자라서 죽는다.

여성 안전을 따로 다뤄야 할 이유.

우리 엄마는 자잘한 일을 다 내게 시킨다. 쓰레기를 내놓는 일부터 위장약을 타오는 일까지, 밖에 나가는 일은 거의 내 몫이다. 엄마가 크게 아픈 건 아니다. 주 5일 8시에서 5시까지 일하고 온다. 다만 조금 불안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동네에는 험악해 보이는 아저씨가 많이 산다. 밤에는 문신한 애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도 한다. 요즘에는 뉴스를 틀면 매일 같이 칼부림, 강간 미수, 살인 예고 소식을 접하다 보니, 엄마는 밖에 나갈 때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집이 편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귀찮아도 하는 수 없다. 내가 움직이는 수 밖에.


엄마유난 떠는 것은 아닌가 보다. 사촌누나들은 1인 가구인데, 스즈메보다 문단속을 철저히 한다. 이유 없이 문을 두들기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고, 집 앞까지 찾아와서 욕을 퍼붓고 가는 전 남자친구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누나 둘은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따로 살고 있다. 한 쪽은 가정이 있어서 같이 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문 앞에 수상한 사람이 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 같다. 그만큼 일상 속에서 불안감을 자주 느끼는 듯하다.


이런 불안감이 정치적으로 표출된 시기는 2016년이다. 그 해 5월에 강남역에서 여성을 노린 묻지마 살인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기폭제로 터진 탓에 여성 안전이 중요한 이슈로 자리 잡았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성추행이나 리벤지 포르노처럼 여성을 노린 범죄가 여러 번 일어났고, 그 때마다 여성들은 불안감을 표출했다. 안국역 페미니스트 시위처럼 과격한 방식은 아니더라도, 여성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꾸준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정치 운동을 벌였다. 여성 활동가는 주요 진보정당을 점거하는 데에 성공했고, 아예 여성 이슈에만 주목하는 정당도 등장했다. 이렇게 여성을 결집시킨 핵심 동력은 역시 불안감이었다.


여성 운동은 여성이 자주 겪는 이슈를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이 여성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면, 여성 운동은 젠더 갈등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제 젠더 갈등은 세대, 이념 갈등보다 심각해졌다. 이런 분위기 탓에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 자체를 역차별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안전은 남녀 모두의 문제이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여성이 특별히 더 많이 희생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과 여성의 안전을 같은 문제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우선 남성이 주로 겪는 문제와 여성이 주로 겪는 문제는 엄연히 다르다. 남성은 주로 폭행당하고 살해당하지만, 여성은 여기에 더해 추행당하고 강간당한다. 또한 가해자의 절대 다수는 남성이다. 모든 남성 범죄자가 여성만 노리지는 않지만, 어떤 남성 범죄자는 여성을 주로 노린다. 다른 남성을 공격하기 보다, 여성을 공격하기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성은 다른 남성과 직접 충돌할 때 주로 공격당하지만, 여성은 그런 맥락이 없어도 피해자가 된다. 여성은 남성보다 언제 공격당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셈이다. 아무리 전체 폭행, 살인 피해자의 과반이 남성이라고 해도, 여성에게는 불안해 할 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올해 8월 19일에도 등산길에서 습격당한 여성이 사망했다. 이런 사건을 두고 다른 곳에서 남자도 당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남녀가 공유하는 안전 문제와 여성이 주로 겪는 안전 문제는 엄연히 다르다. 애초에 사람은 통계를 보고 안심하는 동물이 아니다. 상황이 이런데 안전 앞에 남녀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무슨 이익이 있을까. 여성의 불안감은 생각보다 합리적이고, 그래서 심각하다. 다시 말해, 여성 안전은 여전히 따로 다뤄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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