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완 Sep 07. 2023

19세기 사회주의를 배우면 생기는 일.

저는 사회주의자인데,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노동운동도 공공이익과 충돌할 수 있다. 앞으로도 탈성장이 아니라 지속가능하고 효율적인 경제성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완전한 공유와 평등은 공상이다. 나는 요즘 유행하는 사회주의를 거부한다. 대신, 공적인 투자기금이 능력에 따라 자본을 재조직하기를 바라고, 모두가 기여한 만큼 보상받되 더 많이 기여할 기회도 최대한 보장받기를 바란다. 이런 가치가 보다 역사 깊고 사려 깊은 사회주의라고 믿는다. 근거도 잔뜩 제시할 수 있다.

사회주의자는 동명이인이다. 세상 모든 김정은 씨가 독재자는 아닌 것처럼, 세상 모든 사회주의자가 같은 미래를 설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소개하는 순간 저 간단한 논리가 멈춰 버린다. '사회주의자라면 이래야 한다'라는 근거 없는 당위를 가진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모든 걸 배우는 시대인 만큼, 진보, 보수 가릴 것 없이 다수가 잘못된 당위를 믿기 쉽다. 사회주의를 무너뜨린 주범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탈진실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슬슬 사회주의자라고 소개하지 말아야 하나 싶다. 어차피 단어의 의미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언어는 사회적인 활동이니, 나 혼자 변화를 붙잡는 일은 무의미하다. 게다가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라 행동이다. 사회주의자라는 이름이 사회주의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에 방해된다면, 다른 이름을 찾는 편이 보다 목적 - 합리적일 것이다. 꼭 사회주의자라고 소개해야만 선배 사회주의자들의 설계를 구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는 '사회적인 자유주의자' 또는 '개혁 좌파' 같은 더 포괄적인 이름을 썼다.

한 편으로는 억울하다. 공공이익을 위한 경제관리나 노동시간 단축처럼 좋은 유산을 남긴 선배 사상가를 따르는 건 내 쪽인데, 내전과 학살을 퍼뜨린 후배 사상가와 그 추종자들 때문에 내가 전통 있는 이름을 포기해야 할까. 세상에 지속적이고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건 내가 참고하는 선배들인데, 너무 난리를 피워서 주목받는 후배들 때문에 내가 전통과 단절되어야 할까. 어차피 선배 사상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 선배를 사회주의자라고 소개해야 하는데.

어쩌면, 요즘 사회주의를 싫어하면서도 사회주의자라는 이름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소속감일지도 모른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깊은 소속감을 느낄 수 없던 나는 역사 속 집단을 따르면서 소속감을 느낀 것 같다. 과거의 사회주의자들로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어낸 셈이다. 단어의 의미가 달라진다면, 내 작은 기여가 사회주의를 보다 전통 있는 의미로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소속감을 지키고 싶어서 그런 희망을 다소 억지스럽게 붙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버니 샌더스와 오카시오 코르테스는 가장 유명한 사회주의자다. 나는 저 둘을 동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 둘이 세계 제국의 권력을 잡는 꼴울 보느니, 차라리 사회주의와 거리가 먼 조 바이든이 재선되는 편이 낫다. 그러면서도 저 둘을 마냥 미워할 수 없다. 두 사람 덕에, 사회주의 불모지인 미국에서 사회주의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단어의 의미를 주도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 줬다. 이런 사례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다. 희망일까 희망 고문일까. 아직 확신이 없다.

작가의 이전글 퇴화하는 한국 복지제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