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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Sep 10. 2023

고문과 훈육의 경계

우리의 사회생활이 힘든 이유

가짜사나이 시즌 2를 유튜브 클립으로 보니 가혹성 논란이 일어날 만했다. 교관들은 목적도 근거도 모를 가혹행위를 저질렀다. 시리즈가 끝나고 나서 교관들은 실제로 특수부대도 거치는 훈련과정이었다며 해명했다. 아무래도 성장을 위한 고통과 상처 뿐인 고통을 구분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런 인식 때문에 우리나라 국군이 80년대 이후로 적군보다 아군을 더 많이 죽인, 불명예스러운 조직이 된 게 아닐까.

 

너무 많은 사람이 고문과 훈육을 구별하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매우 위험하다. 우리나라 문화는 능력이나 인격과 무관하게 위계를 나누고, 위 사람에게 아래 사람을 지도할 책임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정과 직장에서 훈육을 명분으로 상대에게 폭언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사건이 끝없이 일어난다. 자기 행동의 결과가 성장이 아니라 자살이어도, 가해자는 자기 탓이라는 점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고문과 훈육에는 서로를 헷갈리게 할 만큼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고문과 훈육은 고의로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다. 훈육도 고문처럼 어떤 식으로든 상대에게 인내와 절제를 강요할 수 밖에 없다. 이렇다 보니, 단순하게 보면 둘의 차이는 의도 하나 뿐인 것처럼 보인다. 똑같이 전기의자에 앉히더라도, 상대방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인지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바라는 것인지에 따라 고문과 훈육으로 나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좋은 의도는 모든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어떤 부모가 갓난아이의 열을 내리기 위해 얼음물에 세 시간 넘게 담가 놓았다면, 의도는 좋았어도 결과는 최악일 수 있다. 고문과 훈육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특수부대 훈련을 통해 인격을 성장시키려는 의도였어도, 그 자체만으로는 일반인을 무분별하게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의도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면, 실제 결과가 어땠는지, 과정이 결과를 실현하는 데에 부합했는지 역시 살펴봐야 한다. 결과와 과정이 부적절하다면, 훈육하기 위한 고통 주기는 불의한 고문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짜사나이 교관들이 저지른 행위는 훈련을 빙자한 가혹행위일 뿐이다. 일반인을 특급전사로 양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튼튼한 병사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훈련 과정을 거치해 하면 될까? 합리적인 훈련 설계자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한계, 다른 말로 역치가 있다. 이 역치를 갑자기 뛰어넘으면 사람의 몸과 마음은 혼자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진다. 그래서 가장 우수한 군인들조차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 있다. 가짜사나이 교관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에 일반인을 특급전사처럼 키운다는 목적도 제시하지 않았다. 뚜렷한 목적이 없으니 적절한 과정을 찾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자연히, 남는 것은 누군가의 재미를 위한 고문 뿐이다.


일상 속에서 교육을 빙자한 폭언, 폭행도 마찬가지다. 달성할 가치가 있는 뚜렷한 결과와 그 결과에 부합하는 과정에 대한 고민이 담기지 않았다면, 모든 폭언과 폭행은 그저 고문이다. 이런 고문은 모든 사람을 법으로 동등하게 보호해야 하는 공화국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적군 포로에게 기밀을 얻어내기 위한 고문도 망설여야 하는데, 죄 없는 일반인을 겨냥한 고문이 정당할 리 없다. 우리나라는 제도도 공화국 답지 않지만, 일상생활도 공화국 답지 않은 셈이다.


시즌 1에서 교관이었던 이근 대위의 폭로에 따르면, 시즌 2 교관들은 정말 전문성이 없었다. 시즌 2 교관들은 어디까지나 훈련받는 입장이었지, 훈련을 설계하고 지도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시즌 2 교관들은 그저 사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괴롭힐 생각으로 가득찬 용병 무리에 불과했던 게 아닐까. 마키아벨리가 왜 그렇게 용병을 싫어했는지 납득이 간다.


물론 사람은 고통받으며 성장한다. 무균실에서 사는 사람은 면역력을 기를 수 없는 것처럼, 충분히 고통받지 않은 사람은 신체적, 도덕적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아무 고통이나 사람을 성장시키지는 않는다. 개인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은 개인이 극복하기 힘든 상처를 남길 것이다. 사람의 성장이 목적인 교육자라면 마땅히 성장을 위한 고통과 상처 뿐인 고통의 경계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 경계를 뚜렷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은 상대를 고문할 수 있을 뿐, 훈육할 수는 없다. 우리의 사회생활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훈육할 자격이 없는 사람 밑에서 산다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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