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세계 우파는 자국 역사를 자랑스러워하거나 과거의 유산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한다. 특히 미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처럼 세계적인 유산을 남긴 나라에서는 그 유산을 지키는 일이 우파의 핵심 역할로 통한다.
자국 찬양에 조심스러운 독일 우파도 큰 틀에서 다르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나치에 저항한 우파는 국민 정체성이 또 다시 폭주하지 않게 절제하는 동시에 옛 유산을 계승하려 했다. 이런 맥락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가장 존경하는 독일인으로 비스마르크 총리를 지목한 적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희대의 악행 탓에 과거 찬양이 금기시되는 독일에서도, 과거를 완전히 끊어내려 하지는 않는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나라 우파는 조금 특이하다. 우리나라 우파는 광복 이전의 역사와 현대 대한민국을 분리하려 한다. 마치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 같은 영웅이 공중으로 흩어진 한반도 남쪽 사람들을 결속시켜서 대한민국을 뚝딱 만들어냈다는 듯이, 우리나라 우파는 광복 이전, 특히 조선시대와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다.
조선왕조의 법궁 입구에 있는 광화문 광장에 이순신, 세종대왕의 석상이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일까? 런던 한 가운데에 넬슨 제독의 기념탑이나 크롬웰 호국경의 동상이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광화문 광장에 이순신, 세종대왕 대신 이승만, 박정희를 두는 게 우파적인 일일까?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니, 자유민주주의자만 기념해야 할까? 애초에 자유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인가?
'이순신은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도 이상하다. 분명 이순신은 대한민국 시민권을 가진 적이 없다. 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단어를 법적인 용어로 써야 할 이유는 없다.
흔히 어느 나라 사람인지 이야기할 때에는 법의 영역을 넘어서 '국민성(Nationality)'도 함께 따진다.
조지 워싱턴은 현대 미국의 가치관 중 상당부분을 공유하지 않는다. 공화주의자였지만 동시에 귀족주의적이었고, 같은 혈통을 공유하는 미국인끼리 강력한 연방정부를 구성하기를 바랐다. 애초에 현대 미국의 중부와 동부는 조지 워싱턴과 무관한 지역이다. 하지만 조지 워싱턴은 현대 미국인과 같은 미국인(American)이자 현대 미국의 건국자로 통한다.
이순신 장군도 마찬가지다. 이순신 장군은 분명 현대 대한민국 사람의 조상이고 한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현대 대한민국 사람과 같은 한국인(Korean)으로 통한다. 법적인 시민권이나 자유민주주의와 무관하게, 이순신과 우리는 같은 국민 집단(Nation)으로 묶인다.
이런 국민성까지 낡은 종족주의라고 이야기한다면, 대체 한국인의 뿌리를 어디에 둘 셈인가? 뿌리 뽑는 게 목적인가?
우리나라 우파는 자코뱅을 흉내내고 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은 구 체제를 상징하는 것을 모조리 파괴하고 다녔다. 전통 귀족, 성직자와 서로 잘 어울리며 지내던 지역에서도 그 지역을 해방하겠다며 혁명에 저항하는 농민들을 학살했다. 심지어 구 체제 전통의 핵심인 기독교와 멀어지기 위해 달력까지 새로 만들었다. 자코뱅은 모든 곳을 '새로운 공화국, 프랑스'에 어울리는 인물와 상징으로 채우려 했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을 광화문 광장에서 치우자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분명 우리나라 내셔널리즘은 오염되었다. 그저 같은 종족이라는 이유로 북한 정권을 옹호하거나 맹목적인 반미, 반일 정서를 자극하는 일에, 주로 좌파 정치인이 내셔널리즘을 이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같은 영역에서 살았던 조상과 그 역사를 공유하는 집단, 즉 대한 사람이라는 국민 정체성을 거부하는 것이 과연 우파적인 일일까. 과거와 단절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유사 자코뱅 같은 프로젝트가 과연 우파 다운 일일까. 열렬한 내셔널리스트이자 자신의 혈통을 자랑스러워한 이승만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나라 우파는 또 다른 캔슬 컬쳐를 자행하고 있다. 사실상 좌파를 미러링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과거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열렬한 반공주의자는 공산주의와 싸운다며 가장 전체주의적인 사회를 만들었다. 반면 또 다른 열렬한 반공주의자였던 윈스턴 처칠은 그렇게 폭주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문제를 개선하고 정치의 중심에 의회를 두는 영국인의 가치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우파는 어느 쪽으로 변할까. 일단 처칠의 길은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