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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Dec 26. 2022

정말 모두가 신앙 없이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너무 빠르게 세속화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신을 믿었습니다. 지금은 모호합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자신의 창조물을 사랑하는 창조주, 그런 존재가 있어야 세상살이가 억울하지 않으리라 여겼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보답받으리라는, 선명한 약속을 믿어야 삶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의 끝에 천국이 없다면, 유일한 박사처럼 살든 조주빈처럼 살든 똑같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면, 삶이 떠넘기는 무거운 고난을 짊어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인이 되기 전, 신앙을 잃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함부로 신이 없다고 단정지은 것은 아니었지만, 신이 있다고 믿기에는 세상이 너무 어수선해 보였습니다. 신앙을 잃은 대가로, 10대 후반부터 전력을 다해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서, 그리고 스스로를 해칠 능력이 없어서 억지로 고난을 짊어지고 있을 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게 다 무슨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꺾여서 그런지, 십 년 넘게 두통과 우울감을 겪고 있습니다. 약을 삼켜도 가벼워지지 않고, 한참을 드러누워도 편해지지 않습니다. 이제는 살짝 거슬리는 상태가 정상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심리학적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람 머리의 주 업무는 예측입니다. 우리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내다보고, 사는 데에 도움되는 행동을 고를 수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은 그 자체로 생존 위협입니다. 나쁜 결과가 예측된다면 더더욱 심각한 위협을 느낄 것입니다. 지금 저는 어떻게 살아야 좋은 결과를 얻고 나쁜 결과를 피할 수 있는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머리가 주 업무에 계속 실패하고 있으니, 당연히 생존이 위태롭다는 신호, 즉 스트레스를 하나 가득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긴장성 두통과 우울감, 불안장애의 주 원인입니다. 딱 제 상태입니다.

무거운 시간을 견딘 탓에, 함부로 신을 믿지 말라고 떠드는 사람들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 류의 전투적 무신론자를 보면 한 겨울에 갓난아기를 성당 앞에 버리는 부모만큼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신앙이 근거 없는 맹신, 외로운 어른을 달래기 위한 판타지 소설일 수는 있습니다. 유신론이 옳다고 볼 근거도 부족하지만, 무신론이 틀렸다고 볼 근거도 부족합니다. 하지만, 대책 없이 신앙을 잃은 대가는 가혹합니다. 모두가 날 때부터 낙천적이고 희망찬 환경에서 산다면 모를까, 생각 보다 많은 사람이 신앙이라는 지팡이 없이는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의 삶을 책임질 것이 아니라면, 함부로 지팡이를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가능성을 따지는 과학은 확신을 다루는 신앙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아직 하늘 위 아버지를 믿고 있다면, 그 믿음을 잃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기운을 차리게 해준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신앙을 가질 이유는 충분합니다. 신앙이라는 색안경을 벗으면, 세상이 잿빛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루종일 잿빛만 보고 있는 것은 그닥 즐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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