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타투존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는 편견 없이 살 수 있을까요?
노타투존은 엄연히 편견입니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과거에는 문신으로 조직폭력배를 찾을 가능성이 높았다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신이 폭력성의 직접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저 취미일 가능성, 예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편견을 없애려는 시도는 가혹합니다.
풀숲이 바스락거릴 때, 우리 조상은 겁 없이 접근하기 보다 맹수가 있을 가능성을 떠올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덕에 지금의 우리가 있습니다. 이런 원시적인 선제 조치는 현대 사회에도 꼭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범죄자가 가득합니다. 모든 사람이 믿을 만한지 알 수 없으니, 우리는 다소 부정확하더라도 범죄자의 두드러지는 특성을 기억했다가 이를 근거로 상대방의 정체를 예측해야 합니다. 이런 단서와 예측이 축적된 데이터베이스가 곧 편견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편견을 없앤다는 말은 위험을 피하기 위한 선제 조치를 금지하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모든 편견을 거부한다면, 밤길에 내 뒤로 건장한 남자가 접근해도 긴장하면 안 되고, 잘 모르는 동네에서 팔에 문신하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나를 불러도 도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행동도 충분한 증거가 아니라 편견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편견은 천사도 신도 아닌 인간이 안전하려면 고를 수 밖에 없는 수단입니다. 그런 수단을 모조리 빼앗는 일이 과연 윤리적이고 인간적일까요?
낡은 편견이 사회적 잠재력을 잠식하는 상황은 피해야 합니다. 어리다고 해서, 여자라도 해서, 외국 출신이라고 해서 누군가를 마냥 배제한다면, 사회는 모든 구성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공공이익을 증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편견을 없애는 건 과합니다. 편견이 없다면, 안전하게 살기 매우 어렵습니다. 안전은 모든 생물의 첫번째 가치인데, 자신을 방어할 수단을 빼앗긴다면 사람은 마음 놓고 산책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적 효율과 편견 사이에서 타협이 필요합니다.
노타투존은 분명 편견이지만, 사회적 효율과 거의 무관합니다. 사업자가 매장에 문신한 사람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누군가가 부당하게 일자리를 잃거나 사회 전반의 생산성이 하락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아직도 문신은 나쁜 사람을 분별하는 주요 단서로 통합니다. 취미로 문신한 사람은 억울하겠지만, 사회적 시선을 고려하지 않은 취미는 어디서나 배척당하기 마련입니다. MZ 조직폭력배가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힘을 과시하는 사회에서, 어디서든 문신할 자유를 요구하는 것은 피아식별을 혼란스럽게 하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도 노타투존을 공격할 근거로는 부족합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사업장 내 규칙을 정할 권리 역시 개인의 자유입니다. 문신한 고객 때문에 다른 고객이 불안해 한다면, 사업자는 문신한 사람을 거부할 자유가 있습니다. 문신할 자유를 사업장 내 규칙을 정할 자유보다 우선시할 이유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는 공공이익과 사회통념보다 앞에 있지 않습니다. 어떤 나라도 개인의 자유를 공공이익과 사회통념보다 앞에 두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동물인 사람은 하고 싶은 대로만 할 수 없습니다. 상처를 가리리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문신은 기본적으로 술이나 담배 같은 사치재입니다. 문신할 자유가 사회적 약자와 관련된 이슈라고 보기도 어렵고, 공공이익이나 사회적 평화보다 중요하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노타투존은 노키즈존과 다릅니다.
피부색, 출신, 젠더처럼 일반적으로 개인이 고를 수 없는 특성에 대한 편견은 모두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가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신은 경우가 다릅니다. 예전처럼 정부가 문신에 대한 편견에 편승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다른 가치를 제쳐두고 문신에 대한 편견을 교정하려 해서도 안 됩니다. 정부가 모든 편견과 싸우는 사회는 다른 자유도 보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차피 사람들이 문신에 익숙해지면, 노타투존도 자연히 사라질 것입니다. 노타투존인 매장이 아닌 매장보다 많은 것도 아니니, 서두를 이유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