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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이 나쁘다고 외쳤다, 집에서만.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

by 이완

솔직히 말해서, 계엄 선포 이후로 한 번도 시위에 나간 적이 없다. 12.3 계엄을 내란이니 반란이니 하며 비판하는 글을 썼지만 광장으로 나가서 그 반란에 맞서지는 않았다. 아는 사람도 업싱 혼자 쭈뼛거리는 모습을 상상하니 차라리 집에 있는 게 도와주는 일인 것 같았다. 3시간 만에 끝난 계엄보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끼는 어색함이 내게는 더 와닿는 고통이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나름 이념적인 이유도 있다. 나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권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광장이 힘을 갖는 순간, 국회 안에서 질서 있게 이뤄져야 할 정쟁이 전국적인 내전으로 확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내전을 지켜보고 있다.

흔히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마다 광장에 더 많은 권력을 허락하자고 요구한다. 직접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거나 압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균질함의 환상에 근거하고 있다. 만약 국민의 절대 다수가 균질하다면, 다시 말해 비슷한 도덕감정과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서 여러 문제를 두고 같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목소리가 국민의 일반의지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민은 정말 균질한 집단인가?

절대 아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유전자와 주로 접하는 환경이 달라서 같은 사안을 두고 충분히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치킨을 보고 침을 흘리지만 다른 누군가는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민은 지역, 성별, 세대, 계급, 종교에 따라서 다른 의견을 보이고, 비슷한 집단 안에서도 각자만의 이유로 다른 의견을 가질 때가 많다.

그 의견 차이는 이성적 판단보다 힘이 강하고 원초적인 영역에서 비롯된다. 과학자들은 도덕 판단이 이성보다는 직관이나 감정의 영역이라는 점을 수도 없이 확인했다. 물론 사람은 이성에 따라 행동할 줄 알지만, 이성은 많은 시간과 정신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신속하게 판단하는 감정을 앞지르기 어렵다. 그래서 매 순간 완벽히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은 있을 수 없고, 절대 다수가 이성적으로 하나의 합의에 이르기란 매우 어렵다.

실제로 지금도 윤석열 탄핵을 두고 찬성하는 광장과 반대하는 광장이 대립하고 있다. 광장에 권력이 있어야 한다면, 둘 중 어느 광장에 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일까? 더 많은 사람이 모인 광장에 권력이 있어야 할까? 이렇게 국민이 서로 합의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열될 경우, 누가 무슨 절차를 거쳐서 하나의 적법한 권력을 인정해야 할까. 남태령 시위대만 국민으로 인정하고 광화문 시위대를 비국민으로 규정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광장은 민주가 아니라 독재의 뿌리가 될 수도 있다. 그 어떤 광장도 모든 국민을 수용할 수 없다. 광장에 십만 명이 모이든 백만 명이 모이든, 그것만으로는 국민의 뜻을 참칭할 수 없다. 하지만 광장에 권력이 생긴다면, 누군가는 광장의 목소리를 국민의 뜻으로 격상시켜서 기존 정치질서를 흔들 수 있다. 실제로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에 모든 권력을!'이라고 외치며 잔혹한 내전을 거쳐 일당 독재를 완성했다. 광장의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는 생각이 다른 사람을 몰살시키려다 파멸적인 내전을 초래할 수 있다.

광장은 위험하다. 소수가 국회 같은 특정 장소에서 규칙에 따라 갈등하는 것은 정치지만, 다수가 여러 광장으로 나뉘어서 규칙 없이 갈등하는 것은 내전이다. 광장에 권력이 있는데 국민이 여러 광장으로 분열된다면, 그 결과는 평화로운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라 이 권력자와 저 권력자 간의 소모적인 권력 투쟁이다. 언제나 갈등은 한정된 곳에서 질서 있게 일어나는 편이 낫고, 그래서 정치는 국회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광장이 곧 국민의 뜻, 국민주권이라는 생각에 너무 익숙해졌다. 그 탓에 탄핵에 반대하는 광장도 국민의 뜻을 앞세울 수 있게 되었다. 국회와 법원이 탄핵 반대 집회의 눈치를 보게 된다면, '광장에 권력을!'이라고 외친 사람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는 셈이다. 시위 참여는 용기 있는 일이지만, 용기만으로 신성한 공화정을 지킬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는 대의제야말로 평화롭게 국민의 뜻을 이끌어낼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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