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는 낙관적이고 둔감하게 태어난다. 또는 어릴 때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가족, 친구, 선생을 만난다. 그런 사람은 남들보다 가혹한 고난을 겪더라도 잘 견딘다. 반드시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비교적 그렇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그렇다.
문제는 모두가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없다는 점이다. 행운의 여신은 평등주의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는 비관적이고 예민하게 태어난다. 또는 마음을 울리는 칭찬 한 마디, 응원 한 마디를 듣지 못하고, 타인에게 마음으로라도 의지해 본 적 없이 어린시절을 보낸다. 그런 사람은 남들보다 가벼운 고난을 겪더라도 금방 무너진다. 운이 나쁜 경우인 셈이다.
무심한 사람은 불운한 사람에게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비관을 낙관으로, 예민함을 둔감함으로 대체해서 삶에 뛰어들라는 것이다. 삶이 레몬을 준다면 우리는 레모네이드를 만들어야 한다나 어쩐다나.
하지만 비관적이고 예민한 사람은 노력에 드는 에너지를 얻지 못한 채로 세상에 던져진다. 또는 에너지가 부족한 채로 태어난 사람은 비관적이고 예민해서 항상 적은 에너지로 산다. 기름이 있으니까 운전할 수 있는 것이지, 운전하니까 기름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 뇌도 마찬가지다. 에너지가 먼저이고 노력이 다음이다.
다시 말해, 무심한 사람은 무기력한 사람에게 초자연적 기적을 행할 것을 요구하는 셈이다. 그야말로 비과학적이다.
청년 사이에서 의욕 있는 사람과 그냥 쉬는 사람이 나뉘는 것도 이런 행운 격차 탓일 수 있다. 그 간격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정부의 사회정책 뿐인데, 우리나라 정부는 광복 이래로 효과적인 사회정책을 충분히 도입한 적이 없다. 지금도 사회보험 위주의 비스마르크식 복지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의 어린시절이 불행하지 않게 하는 일에 뛰어든 적이 없다면, 드러누워 버린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여줄 수 없다면, 안타깝지만 노력을 요구할 자격은 없다. 에너지를 나눌 생각 없이 노력만 요구하는 것은 우월감과 인간 혐오의 표출일 뿐이다.
진심으로 타인이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 타인의 처지를 이해해서 알맞는 해법을 찾아주는 사람은 정말 귀하다. 그것이 희망을 보지 못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하지만 희망이 시야에 없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정국은 혼란스럽지만 행정은 그럭저럭 기능하고 있다. 나라 빚이 늘고 있다지만 나라가 가진 자산도 만만치 않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도구가 살아있는 셈이다.
게다가 노력할 에너지를 가진 사람 중에는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하기 보다, 여럿이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변화는 가능하다, 우리가 현실을 직시한다면.
"겨울이 깊었으니, 봄이 멀지 않았을 것입니다."
- 최명길(이병헌 분), 영화 '남한산성'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