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조직문화와 저임금을 고집하는 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다.
과거는 더 가혹했다. 주5일제도 없었고, 근로기준법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도 없었다. 심지어 최저임금도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 앞세대는 일했다. 고향에 머물며 농사 짓는 사람도 있었지만, 산업화는 그런 유유자적함을 그냥 두지 않았다. 앞세대는 뭔가 특별한 힘을 갖고 있던 걸까. 그래서 더 가혹한 노동환경을 견딜 수 있던 걸까. 똑같은 종인데 그럴 리 없다.
당시에는 견뎌야 할 이유가 있었다. 자녀는 부모를 부양해야 했다. 사회적 시선은 더 강렬했는데, 공적 연금이 더 부실했기 때문이다. 결혼과 출산도 빨랐다. 요즘과 다르게, 다들 30대가 되기 전에 짝을 찾아서 자녀를 낳았다. 그래야 멀쩡한 사람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그 덕에 과거의 사장님이나 부장님은 혁신하는 리더쉽을 발휘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성질부리고 짜증내고 윽박지르면,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아랫사람이 알아서 기었다. 그 중에서 유달리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 다른 말로 사회생활 잘 하는 사람을 자기 후계자로 만들고 은퇴하면, 그 때부터 부장님은 재테크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 부장님을 보며, 아랫사람은 질 나쁜 조직문화를 견디면 나름의 보상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동기가 있으면 사람은 조금 더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다. 과거에는 일이 가혹해도 견뎌야 할 동기가 있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기 때문에 알코올 의존증과 가정 폭력이 만연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서라도 고난을 견뎌야 할 이유가 많았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다. 공적 연금이 강화되면서 부모를 직접 부양해야 한다는 인식이 옅어졌다. 서로 같이 살기 어려울 정도로 생활방식이 달라진 점도 원인이었다. 이제는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요양원에 보내는 것이 당연해졌다.
또한 다들 내 가족만 보고 일하다 보니 불평등에 신경쓰지 못했다. 그 사이에 불평등은 모두를 미치게 할 만큼 강해졌다. 이제 멀쩡한 사회구성원이 되려면 불평등 탓에 부풀려진 평균치를 애써 따라잡아야 한다. 대학을 가야 하고, 명품을 들어야 하고, 중위소득보다 많이 벌어야 한다. 그 탓에 초혼 연령도 높아지고, 아예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게다가 질 나쁜 조직문화는 더 이상 보상을 약속하기 어려워졌다. 일자리가 불안정해지고 경제성장이 멈췄다. 이제는 50대에 은퇴해서 다시 일자리를 준비하거나 무모한 투자에 목매야 한다. 그래서 모든 고난을 견딘 다음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다시 말해, 요즘 사람은 가혹한 노동환경을 억지로 견뎌야 할 동기가 없다. 경제발전에만 초점을 두고 사회문제를 방치한 결과, 예전과 같은 폭력적인 환경을 비판 없이 견딜 이유가 사라져 버렸다. 사람은 이유 없이 고통을 견디지 않는다. 이유 없는 고통은 다른 말로 고문이고, 특이 취향인 사람 외에는 누구도 고문을 자처하지 않는다.
이제, 질 나쁜 조직문화와 저임금을 개선하지 않는 기업은 미래가 없다. 실제로 혁신할 의지도 없고 방법도 모르는 기업은 서서히 도태되고 있다. 나라가 그런 기업을 부양해야 할 이유도 없다. 국가는 다시 교육받을 기회와 능력에 맞게 일할 권리를 보장해 줄 수는 있지만, 변화 없이 살 권리를 보장해 줄 수는 없다.
따라서, 가장 혁신이 필요한 분야는 기술이 아니라 조직문화와 임금체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