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정부의 역설
사실, 참신한 청년 정책은 필요 없다. 청년에게 필요한 정책은 정신건강과 자살 문제를 겪을 때 보다 편리하게 상담받을 수 있고, 교육비와 주거비를 낮추고, 좋은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다. 건강, 생활비, 삶의 기회가 어느정도 안정되면 나머지는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그런데 공공기관은 매해 공모전을 열어서 참신한 정책을 찾는다. 그 결과, 지역에 이사 온 청년에게 생필품 세트를 선물하고 맞선을 주선하는 데 예산을 지출한다. 사실상 구멍 뚫린 풍선에 바람 넣기다.
공공기관이 저러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어 보인다. 돈이 없어서 큰 대책을 마련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다. 그러니 한정된 예산을 되도록 눈에 띄게 활용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닐까. 예산 삭감을 피하기 위해 남은 예산을 아무렇게나 쓰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낭비는 작은 정부의 역설이다. 예산 제약이 심한 탓에, 각 기관은 100만 원이 필요한 문제에는 손을 대지 못하면서, 만 원이 필요한 일을 끝없이 늘린다. 그 탓에 기관장이 이력을 쌓고 은퇴하는 동안 사회문제는 곪아버린다. 그렇다고 자잘한 기관을 폐지한다면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정부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사회적 비교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평균만큼 사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불필요한 명품을 구매하거나 무모한 투자를 저지른다.
정부도 비슷한 처지다. 민주적인 정부는 국민의 권리를 지키고 사회문제를 해결할 것을 항상 요구받는다. 그런데 예산을 너무 억제하면 성과를 꾸미는 데 전념하게 된다. 온갖 규제를 남발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할 수 있는 것이 규제 늘리기 뿐이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정부가 필요한 곳에 없다고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정부가 너무 많이 개입한다고 느낀다. 성과 압박을 받는 작은 정부는 모두를 불만족스럽게 하는 셈이다. 작은 정부는 엉뚱한 일에 예산과 권력을 분산시키면서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부터 작은 정부를 고집해 왔다. 그 폐해도 다 겪었다. 공직자 임금을 억제한 탓에 매관매직과 착취가 성행했다. 일본이 대대적인 투자로 군수산업을 일으킬 때, 우리나라는 왕실의 비자금으로 무의미한 작업장 몇 개를 겨우 지었을 뿐이었다. 그 대가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큰 정부가 항상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정부는 나라가 처한 문제의 크기에 비례해서 덩치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유능한 정부라면 더 많은 예산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작은 정부론자는 어떤 문제가 일어나든 겉으로 보이는 재정 지출을 억제하는 데만 집착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무능한 공공기관과 고통스러운 사회문제를 청년에게 떠넘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