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롤스의 정의론이 태어나는 과정을 담은 책
어제 책이 도착하자마자 50페이지 넘게 읽었다. 눈이 지쳤다는 것이 느껴질 때 겨우 책을 덮었다. 아마추어 정치철학자에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책이었다. 책은 정의론으로 유명한 존 롤스에 초점을 둔다. 정확히는, 롤스 사상이 어떤 조건에서 나타났고, 어떻게 변화했고,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다룬다.
그 과정에서 젊은 시절 롤스의 생각 뿐만 아니라, 1930년대 - 50년대 미국과 영국의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의 논의도 보여준다. 당시 롤스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일상언어학파 철학자와 노동당의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을 토대로 자신의 사상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 머물던 시기에 그는 종잇조각에 "급진 정치의 주된 목적이란 노력을 기울이기만 하면 충분한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모든 이가 사회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심지어 보수파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썼다. 롤스는 기회의 평등이야말로 급진 정치의 목표라고 시사한 것이다.] - 본문 중
당시 미국에서는 매카시즘 광풍이 공산주의 뿐만 아니라 역사 깊은 미국 의 진보주의 담론들까지 공격하고 있었다. 심지어 존 듀이도 빨갱이로 내몰렸다. 당시 미국 자유주의자들은 뉴딜이 보여준 국가통제의 가능성을 믿는 쪽과 국가개입의 전체주의의 뿌리로 보는 쪽으로 분열되었지만, 건설적인 논의가 이뤄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영국은 달랐다. 영국 사회주의자 중에서는 산업의 국유화, 공영화보다는 소득 재분배에 초점을 두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국가가 산업을 직접 소유하고 경영할 필요 없이, 소득을 재분배하며 특히 기회를 평등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엄격한 의미의 '공정한 경쟁'을 위한 토대를 갖춰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롤스는 토론이 죽어버린 미국을 떠나 영국에 머물렀다. 그리고 영국 좌파들의 이념 갈등을 보며 정의의 원칙을 보완해 나갔다. 훗날 그 결과물로 내놓은 것이 죽어가는 정치철학 논쟁을 부활시켰다는 '정의론'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2019년에 쓰였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2025년이다. 6년의 간극이 밉다. 왜 우리나라는 좋은 사상을 빠르게 수입하지 못할까. 역시 원서를 읽을 만큼 영어를 알아야만 뒤쳐지지 않을 수 있는 걸까. 우리나라 스스로 롤스에 버금가는 정교한 생각을 배출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수입이라도 빨라야 하지 않을까.
단언컨데 올해 접한 책 중 최고다. 올해 중에 이것보다 훌륭한 정치철학책이 나올지 의문스럽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마음 같아서는 사회가 왜, 어떻게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지 묻는 주변 사람들에게 다 선물하고 싶다. 그런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