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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이 인류 존속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차별금지법의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by 이완

"모든 인간이 동성애 택하면 인류 지속 못해."

- 김민석 총리 후보자,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며


잘못된 비탈길 논증이다. 하이에크가 모든 사회주의, 국가개입 정책을 전체주의의 앞잡이로 본 것과 비슷하다. 결국 하이에크는 틀렸고, 김민석 총리 후보도 그렇다.

물론 차별금지법이 시행되면 동성애자가 잠시 늘어날 수는 있다. 동성애가 사회의 주류 문화로 편입되면, 지금까지 성적 지향에 대해 고민해 본 적 없던 사람도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계기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에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동성애자가 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도 굉장히 낙관적인 시나리오일 뿐이다. 동성애자가 인류 지속을 위협할 정도로 늘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성적 지향에는 타고나는 면이 있고, 전통적인 관습은 어떤 식으로든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확산할 정도로 동성애가 편리하고 거부감 없는 선택이었다면, 진작 사회의 주류가 되었을 것이다.

김민석 총리 후보의 발언이 자신의 신념인지 아니면 보수층에 어필하기 위한 정치 수사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그닥 합리적인 발언은 아니다. 차별금지법에 반대할 근거가 차고 넘치는데, 굳이 가장 나쁜 것을 가져와야 했을까.

차별금지법의 문제는 따로 있다.

우선 양심을 부당하게 차별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종교적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할 권리를 부족하게나마 허락하고 있다. 종교가 국가안보 위에 서는, 매우 반공화주의적인 발상이지만, 아무튼 법원은 양심의 자유를 우선시했다.

차별금지법은 채용이나 상품 거래에서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면 차별하지 못하게 한다. 법이 입법되면, 보수적 기독교 재단이 운영하는 대학교는 양심과 상관 없이 동성애자를 교직원 또는 교수로 채용해야 한다. 보수적인 빵집 사장은 동성애자 손님을 거부할 수 없다.

어떤 양심은 국가안보라는 중요한 가치보다 위에 있는데, 어떤 양심은 자신의 사유재산 안에서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양심의 자유가 소중하다면, 왜 두 양심은 다르게 대우받아야 할까. 성소수자 권리가 국가안보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일까.

또한 법이 너무 모호하다. 예를 들어,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귀와 입술에 피어싱을 한 사람이 공공기관에 입사하려 했다. 그런데 공공기관은 소비자의 공포감을 근거로 문신 가득한 사람을 채용하지 않았다. 이럴 경우는 합리적인 차별인가 아닌가. 공공기관이 아니라 고급 호텔인 경우라면, 합리적인 차별인가 아닌가.

성적인 매력이 중요한 직업이 있다. 속옷 모델이라든지, 치어리더라든지. 성적 매력이란 매우 모호하고 자의적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대략적인 기준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주류 기준으로 봤을 때 성적 매력이 부족한 사람이 치어리더에 지원했다가 탈락했다. 이럴 경우는 합리적인 차별인가 아닌가.

이런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길 때, 법안만 보고 재판장에 가기 전에 판결을 어느정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애초에, 법정에 가기 전에 합리적인 차별의 기준을 명확하게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 당장'을 외칠 수 있는, 완성도 높은 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차별금지법은 구멍 투성이다.

일단 도입해 보고 조정하면 된다는 의견도 있지만 무책임한 소리다. 처벌당한 사람이 나오고 나서 잘못된 점을 고치면 아무 소용 없다. 그 사람의 삶은 무시해도 되는 걸까.

게다가, 차별금지법은 처벌에만 의존한다. 많은 사람이 일상에 치이느라 진보적 관점에 익숙해질 여유가 없었다. 특히 앞세대는 술과 담배를 배워야만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 있던 것처럼, 보수적인 관습에 충성해야 번듯한 사회 구성원으로 대우받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차별주의를 체화한 사람들이 적지 않고, 그렇게 체화된 습관은 개인의 노력으로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차별금지법은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을 그저 처벌로 다스리려 한다. 소수자를 포괄하기 위해 다수자를 배제해 버리는 셈이다. 이 나라의 평등주의자들은 관용과 연대의 이름으로 무자비한 법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술과 담배를 처벌로 근절하겠다는 것처럼 무모하다.

차별금지법을 도입한 나라 중에 극우의 준동과 사회갈등을 겪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실제 법안 내용과 상관 없이, 오래된 관습을 처벌로 교정하겠다는 발상이 마치 좌파의 정복 활동처럼 여겨지고 있다.

'지금은 채용과 거래 같은 특정 영역에 한정하고 있지만, 언젠가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런 비탈길 논증은 마냥 불합리하다고 보기 어렵다. 동성애자 천지가 된다는 발상에는 생물학적, 통계적 반박 근거가 있지만, 차별금지법이 확대될 수 있다는 발상에는 그런 근거가 없으니까.

이렇게 갈등을 조장하는 법이 정말 동성애자의 권리를 오래 지켜줄 수 있을까. 차별금지법 폐지와 성소수자 배제를 외치는 극우 세력의 준동을 예방할 수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좌파는 근시안적인 이익에 눈이 팔려서 장기적인 혼란을 외면하고 있다. 이미 그런 혼란을 겪는 사례가 있는데도 말이다.

차별금지법은 부족하고 배제적인 법이다. 동성애 확산따위보다 더 큰 문제를 품고 있다. 우리는 더 많이 논의해야 한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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