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보수가 함께 실수하는 부분이 있다. 사람들이 하나의 직업으로 평생 먹고살 수 있게 도우려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타다'와 '우티'가 나타났을 때, 택시기사들은 분신자살까지 하며 저항했고 정치는 결국 택시기사의 편에 섰다. 그렇다고 해서 택시 산업이 안정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지만.
직업을 잃는 것은 상당히 괴로운 일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대책 없는 곳에서 실업은 사람의 생계와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우울증과 자살 위험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하고 사람들의 욕구가 달라지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직업은 살아남을 수 없다. 재화와 서비스를 더 느리고 비싸게 생산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직업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래서도 안 된다. 경제의 목적은 소비이지 생산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산하기 위한 생산만큼 사람과 자원,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어디 있을까.
사회 전반이 더 많은 이익을 누리려면, 어떤 직업은 대체되어야 한다. 사실 택시도 인력거를 밀어내고 자리잡은 일이다. 모든 자동차 관련 산업은 인력거꾼 김 첨지처럼 오래된 교통 서비스 종사자를 실업자로 만들면서 성장했다. 인력거나 마차를 위해 새로운 산업을 막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사회는 인력과 자원을 가능한 한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래야 최대 다수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러면 인력과 자원을 합리적으로 재배치해야 한다. 물론 시장경제가 주도하는 재배치 과정에서는 실업자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정부가 적극적 노동정책으로 고용을 지탱해야 한다.
기존 직업이 사라지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진짜 문제는 그 재배치 과정에서 나타나는 실업을 방치하는 것이다. 혁신을 이루려면 파괴해야 한다지만, 그 파괴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일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곳곳에서 비효율을 방치 또는 방조하는 동시에 효율의 피해에도 무관심하다.
물론 어떤 직업은 경제적 효율성보다 중요한 가치 때문에 끝까지 부양해야 할 수도 있다. 공공도서관 사서라든지, 노인을 위한 공공일자리라든지, 순수학문 연구자라든지. 하지만 대부분의 직업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대체되어야 한다. 지금의 직업이 과거의 직업을 대체하며 자리잡은 것처럼.
사실, 효율성은 19세기 사회주의자에게도 중요한 과제였다. 생시몽은 자본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해서 기술 발전을 극대화하기를 바랐다. 기술이 우리가 처한 빈곤과 갈등을 해결해 줄 핵심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시몽의 제자 중에는 직접 금융업에 뛰어드는 경우도 있었다. 오언도 노동권이 작업 효율을 높인다는 점을 증명하려 애썼다.
원래 사회주의자는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번영을 누리기를 원했고, 그래서 적은 시간과 노력으로 최대한을 끌어내는 생산 방법을 고민했다. 19세기 사회주의 뿐만 아니라, 미국의 진보주의 운동과 뉴딜 정책도 그랬다. 진보주의자가 효율성을 무시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보수주의자 중에도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효율성을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 우리나라는 효율성을 지나치게 악마화한다. 진보에게 효율성은 비인간성과 같은 말이고, 보수에게 효율성은 진보를 공격하는 데 좋지만 지역 민심을 얻는 데는 도움되지 않는 명분이다.
단언컨대 비효율적인 사회는 인간적일 수 없다. 우리가 누리는 것들은 효율성에 상당히 기대고 있다. 심지어 기본적인 권리도 그렇다. 모든 권리는 정부가 법과 예산을 집행할 때 비로소 의미 있게 실현된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에서는 기본권도 귀하다. 번영하는 사회야말로 더 많은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인 셈이다.
따라서 효율성은 그 악영향과 함께 다시 주목받아야 한다. 새로운 기술 경쟁의 시대에 다 함께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