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를 모른다. 책 원고를 핑계로 공부 계획을 다 미뤘다. 글 쓸 때 여러 논문을 인용하고 있지만, '회귀분석'이나 '순차매개효과'가 무슨 뜻인지 아직도 모른다. 경제사상 논문은 읽을 만한데, 수식 가득한 경제학 논문을 보면 눈이 글자를 읽어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통계에 기반한 논문의 경우, 서론과 결론만 읽고 판단한다.
그렇다고 아무 논문이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아마추어 나름의 방법을 쓰는데, 바로 '권위'와 '정합'을 잣대로 삼는 것이다.
여기서 권위는 말 그대로다. 학자와 학회의 권위를 잣대 삼아서 판단하는 것이다. 먼저 권위 있는 학자가 권위 있는 학회에 올린 논문의 서론과 결론을 읽는다. 그 부분에 특별히 과한 해석이 있는지만 확인한다. 문제가 없다면, 그 논문을 참고자료로 채택한다. 최근에는 제미나이나 클로드가 학자, 학회의 공신력까지 검토해 줘서 더 판단하기 수월해졌다.
만약 여러 학자의 의견이 충돌할 경우, 비슷한 주제를 다룬 논문들을 더 검색해 보고 주류 또는 다수 학자가 지지하는 것을 고른다. 이는 분명 권위에 의한 논증이다. 사실 굉장히 위험한 방법이다. 하지만 직접 검증할 능력이 없는 아마추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이다. 심지어 학자들도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자주 채택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에베레스트 산의 높이는 약 8,800미터다. 그런데 그걸 무슨 근거로 믿을 수 있을까. 내가 직접 측정하고 검증해 볼 방법은 없지만, 그 사실을 믿는 데는 아무 문제 없다. 권위 있는 사람들이 측정한 결과이고, 딱히 의심할 이유가 없으니까. 식품에 붙은 성분 표시도 그렇고, 식당의 위생 점검표도 그렇다.
이처럼 우리 일상에는 권위를 근거 삼고 검증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걸 모두 권위에 의한 논증이라며 거부했다가는 일상이 망가질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첨단 과학도 논리적으로 깔끔하게 증명하지 못하는 전제들에 기반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과학은 지금까지 관찰한 일이 앞으로도 관찰될 것이라는 믿음을 대전제로 두는데, 이는 전혀 증명할 방법이 없는, 논리적으로 따지면 '일반화의 오류'다.
하지만 자연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은 너무 유용해서 지금까지 과학의 권위를 지탱하고 있다. 과학을 일반화의 오류라며 거부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런 점에서, 논리적 오류인 판단도 상황에 따라서는 합리적일 수 있다. 어떤 오류는 살아가는 데 불가피하다. 모든 추론의 밑바닥에는 증명할 수 없는 전제가 있기 마련이고, 이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논리의 한계선이다. 어디에서 증명을 멈출지는 목적에 따라, 연구 방식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영역이다. 여기서 오류를 저지를 수 밖에 없다.
모든 실험과 통계를 직접 검증할 수 있는 사람만 사실을 믿고 의견을 제시해야 한다면, 대다수는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이다. 물론, 모든 영역에서 권위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에베레스트 산 높이는 수 많은 사람이 비교적 수월하게 검증할 수 있는 편이다. 숨길 수 없으니까. 그런 경우에는 권위에만 기대도 괜찮을 것이다.
문제는 사회구조나 심리적 고통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경우, 그리고 경제성장이나 투표처럼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야 하는 경우다. 그런 경우에는 권위 있는 사람의 의견을 곧이곧대로 따르기 애매하다. 세상에는 별 것 아닌 권위로 논의의 복잡함을 숨기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나는 두번째 잣대, '정합'도 함께 활용한다. 정합은 여러 주장이 서로 일관적으로 맞물리며 하나의 네트워크를 이룬 상태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심리학자들은 모든 사람이 유능성 욕구를 갖는다고 여긴다. 물과 잠처럼, 자신이 유능하다는 느낌은 기본 욕구다. 즉 결핍되면 문제가 생긴다. 이 이론은 매우 권위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 경험담이나 역사 사례, 사람 동기를 연구하는 다른 이론과 잘 맞물린다.
그런데 최근 많은 청년이 공부도 취업도 포기한 채 드러눕고 있다. 이 문제를 두고 개인의 게으른 선택부터 탓하는 것은 기존 심리학 이론과 맞물리지 않는다. 누구도 수면 욕구를 완전히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유능성 욕구도 그럴 테니까. 물론 호르몬이나 신경계 등에 문제가 있으면 불면증에 걸리는 경우도 많다. 이는 엄연히 질병이지 각자의 선택이 아니다.
이런 사례를 볼 때, 드러눕는 청년의 경우에도 유능성 욕구를 억제하는 어떤 문제가 있다는 의견, 예를 들어 학습된 무기력감이 확산하는 중이라는 의견이 기존 이론들과 더 잘 맞물린다. 즉 정합적이다. 그래서 나는 무기력 확산을 그냥 쉬었음 청년 증가의 주범으로 여긴다.
때로는 권위가 낮고 비정합적인 주장을 실험적으로 선택하기도 한다. 내 방식이 절대적으로 맞다고 여기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럴 때는 따로 단서를 달아두려 한다.
언젠가 온갖 통계와 수식을 직접 이해하고 검증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지만, 그 날이 올 때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니 오류가 있더라도, 좋은 판단에 근접할 수 있는 방식을 활용할 수 밖에 없다. 언제나 이 없으면 잇몸이다.
아마추어의 헛소리라고 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정도면 고등학교 중퇴자치고는 굉장히 정교하게 논문을 검토하는 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