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부족주의자다
사고실험이다. 빨간 알약을 먹은 사람 1000명 중 100명이 가벼운 감기에 걸렸다. 파란 알약을 먹은 사람 1000명 중 2명이 심각한 대장암에 걸려서 사망했다. 둘 중 하나를 전국민에게 반드시 먹여야 한다면, 어떤 알약을 고르는 것이 안전 면에서 합리적일까.
낙관적인 사람은 나쁜 결과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 낮은 파란 알약을 고를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통제할 수 있는 결과를 초래하는 빨간 알약을 고를 수 있다. 나 같은 경우는 빨간 알약을 고를 것이다. 대장암으로 인한 사망은 가능성이 낮아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니까.
사람은 도망칠 줄 아는 조상의 후손이다. 풀숲이 바스락거리는데 그 안에는 토끼가 있을 수 있고 사자가 있을 수 있다. 그 때 우리 조상은 사자가 있을 가능성을 염려해서 도망칠 줄 알았고, 그래서 후손을 남길 수 있었다. 이런 안전 심리는 우리가 부정적인 사건이나 감정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때로는 나쁜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 그 자체보다,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사건의 심각성에 더 주목해야 할 때가 있다. 사람들이 특정 출신의 난민을 두려워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중동과 북아프리카가 내전에 휩싸일 때, 여러 유럽 국가가 무슬림 난민을 받아들였다. 독일과 스웨덴의 경우, 수십만 명을 단기간에 받아들였다. 이후 유럽에서는 난민에 의한 잔혹한 범죄가 여럿 일어났다. 묻지마 살인과 성폭행, 심지어 테러까지, 적지 않은 유럽인이 난민에 의해 다치거나 죽었다.
유럽 곳곳에서 난민 사이에 섞여 들어온 테러리스트가 테러를 일으켰을 때, 난민 지지자들은 진지하게 사과하거나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럽 통계를 보면, 독일 등에서는 난민 유입 이후 범죄율이 급등했다가 가라앉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몇몇 사람은 장기적으로 난민이 범죄율 상승과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급등한 시기가 있다는 점 자체가 문제다. 그 범죄율이 급등한 시기에는 분명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다. 장기적으로 죽는 사람이 줄어든다고 해서 단기적으로 죽는 사람을 외면해도 된다는 법은 없다. 난민을 받지 않거나 조심스럽게 받았다면, 피해자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안전 심리를 무슬림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로 규정하는 것은 간편하다. 하지만 그런 규정이 안전 심리를 극복하게 도와주지는 않는다. 최악의 사건들이 여러 번 일어났는데, 그에 대한 마땅한 대비책도 없이 경계를 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안전 면에서 매우 무책임하다.
불안은 매우 강한 감정인 만큼, 마냥 방치하면 외국인에 의한 범죄가 없더라도 외국인을 향한 범죄가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의 사고방식으로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결론을 편견이니 혐오니 하며 비난하기보다, 애초에 그런 결론을 갖지 않을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해야 한다.
다인종 사회가 싫은 것도 아니고, 아랍인과 한국인의 혼혈이 싫은 것도 아니다. 역사를 보면 혼혈은 필연에 가깝다.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의 안전, 오직 안전이다.
물론, 유럽이 난민을 받지 않았더라면 자국민 10명 대신 난민 100명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을 똑같은 1인으로 보는 세계시민주의자 시선에서, 자국민을 지키기 위해 난민을 외면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도덕 감각은 유일무이한 진리가 아니다. 아빠가 어린 딸의 방에 허락 없이 들어가는 것과 낯선 남자가 여중생의 방에 허락 없이 들어가는 것. 이 두 사건은 엄연히 죄의 무게가 다르다. 세계시민주의자의 직관으로도 두 사건이 같은 문제로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친구가 배척될 때는 육체적 고통의 경험에 관여하는 뇌 부위가 활성화됐으나, 낯선 이가 배척될 때는 그렇지 않았다.25 또한 이와 비슷한 연구들의 결과에 따르면, 이른바 뇌의 ‘고통망pain network’은 같은 인종이 고통을 받는 걸 지켜볼 때 활성화되는 반면, 다른 인종의 고통을 지켜볼 때는 활성화되지 않았다.26 결국 아주 현실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모든 연구 결과는 우리가 낯선 이나 외부인의 고통보다는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 또는 동포의 고통에 훨씬 더 크게 반응한다는 걸 보여준다."
- 마이클 맥컬러프, 타인의 친절, 엄성수 옮김, 비잉, 2021.
개인의 권리를 실현할 첫번째 책임 소재는 그 사람이 속한 국가다. 시리아인의 권리는 먼저 시리아 정부에 물어야 할 문제다. 무엇보다 내셔널리스트 시선에서 봤을 때, 자국민 한 사람을 지키는 것은 잘못된 지도자를 섬긴 탓에 문제를 겪는 외국인 열 사람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
이런 편애 감정, 부족주의 감정은 모두가 타고나는 것, 자연스러운 것이고, 사회를 결속시키는 힘이다. 부족주의 감정이 순혈주의나 나치즘으로 흐르지 않게 경계해야 하지만, 인간적인 감정 자체를 도려낼 수는 없다. 내셔널리즘은 나치즘이 아니다.
불가능한 요구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불의하다. 모든 권리는 어떤 식으로든 사회의 수고와 비용을 요구하기 마련이고, 국가는 그 한정된 역량을 국민에게 먼저 나눠야 한다. 국가가 국적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보호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전세계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할 수 있는 국가는 세상에 존재한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바람직한 것과 실현 가능한 것은 다를 수 있다. 물론 세계시민주의가 바람직한지 의문이지만.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든 외계인 방어를 위해서든 인간 사회들이 서로 의지할 때라 해도, 차이점의 무게감이 감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전 세계 사람들이 인류 전체와 하나로 연결된 느낌을 가질 것이라는 범세계주의 관념은 하나의 몽상에 불과하다."
- 마크 모펫, 인간 무리, 김성훈 옮김, 김영사, 2018.
"모든 자유민주주의는 국가 조직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지며 각굳의 정치적 관할권은 각자의 영토 범위에 의해 제한된다. 그 어떤 국가도 자신의 관할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할 무제한의 의무를 떠맡을 수는 없다. 그리고 모든 국가가 그렇게 하려고 시도할 경우 더 나은 세상이 될지도 불투명하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이수경 옮김, 2020.
그렇다고 난민을 하나도 받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이고, 자유주의의 대원칙은 '차별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다면'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불행은 국경을 넘어 전염될 수 있으니, 우리나라도 국제연대 차원에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다만, 원칙은 원칙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자국민이 억울하게 가족을 잃지 않도록,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할 수 있는 역량에 비례하게 난민을 받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난민의 이동을 철저히 제한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애초에 난민이 생기지 않도록 외국의 번영을 적극 지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