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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Nov 24. 2022

회의주의 정신이 부족합니다.

전혀 당연하지 않은 당연함.

페이스북에서 토론하다 보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간혹, 자신의 신념을 특별한 근거 없이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을 상대하기 때문입니다. 개념 정의도, 추론 과정도, 전제의 타당성도 불명확하지만, 아무튼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하나부터 열까지 비판하고 싶지만, 그럴 시간도 능력도 부족합니다. 하는 수 없이 혼자 삭이다가 화면을 넘길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일을 겪다보니, '당연하다'라는 말을 혐오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하다'는 과도한 의심을 멈추고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해줍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면, 우리는 불안에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하다'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당연하다'가 남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다'는 타당한 의심조차 차단합니다. 다른 대안이 있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있는 상황에서도, 다른 대답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듭니다.

'당연하다'의 이런 폐쇄적인 면이 온갖 사회 갈등을 일으킵니다. 우리나라를 정체시키고 있는 갈등들을 뜯어 보면, 이 '당연하다'가 저 '당연하다'를 흥분한 황소처럼 들이받아서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흥분한 황소가 다른 황소를 들이받았으니, 남는 것은 상처와 아드레날린뿐인 소싸움입니다. 어느 한 쪽이 쓰러질 때까지 끝나지 않는, 잔인한 쌈박질뿐입니다. 각자의 이익을 존중하고 서로 포기할 것은 포기하는, 건설적인 대화도 분명 가능하지만, '당연하다'가 우리의 전두엽을 마비시킵니다.

모든 '당연하다'는 엄격한 회의주의 앞에서 평등해 집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생각은 미처 증명이 끝나지 않은 가설일 뿐이고, 우리는 그 가설을 마저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집요하게 증명을 요구하다 보면, 우리는 더 이상 추론으로 증명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하게 됩니다. 모든 추론은 증명되지 않은 전제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과학이든 도덕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증명을 도충에 멈출 수는 있지만, 어느 지점에서 멈출지 합의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끝없는 의심의 관점에서, 모든 '당연하다'는 똑같은 독단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회의주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회의주의는 우리를 과도한 의심의 늪에 빠뜨릴 때도 있지만, 내 믿음이 당연하다는 환상을 깨주기도 합니다. 모두의 당연한 믿음이 사상누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겸허한 마음과 함께 건설적으로 대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건설적으로 대화할 때에만, 우리는 갈등을 조율하고 하나될 수 있습니다. 회의주의는 끝없는 평행선을 하나로 이어줄 다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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