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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May 10. 2023

우리나라 보수는 냉랭합니다.

원래는 안 그랬습니다.

우리나라 보수주의는 너무 차갑습니다. 원래 보수주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한창일 때, 일부 토리 정치인은 가혹한 노동조건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꾸렸고, 긴 논의 끝에 현대 근로기준법의 조상 격인 공장법을 도입했습니다. 자본가와 자유방임주의 정치인이 반대했지만, 일부 자본가와 개혁적인 자유주의자는 더 강한 규제를 원했습니다. 비록, 당시 영국 정부는 충분한 공무원을 고용하기 어려웠던 탓에 공장법을 집행하지는 못했지만, 공장법은 당시 영국인이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 인도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증거입니다.

영국 보수주의의 상징으로 통하는 윈스턴 처칠은 영국의 대량실업과 질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정부를 만들었습니다. 몇몇 직종에 한정된 실업보험을 도입했고, 국민의료서비스를 지지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처칠은 철저한 반사회주의자이자 사회적 자유주의자로 보였습니다. 이런 처칠의 노선은 영국 보수주의 역사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비스마르크처럼, 영국 보수주의자는 계급 사회이자 기독교 문명인 영국을 지키기 위해 사회문제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보수주의자의 개혁 정신은 1970년대까지 영국의 사회문제를 꾸준히 개선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보수주의자도 사회개혁에 무관심하지 않았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흔히 보수진영 사람으로 통합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 역대 그 어느 정부보다 강력한 개혁안을 시도했습니다. 그 뒤를 이은 김영삼 대통령 역시 주변의 반대를 꺾고 고용보험을 도입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화법과 재정 준칙은 신자유주의적이었을지 몰라도, 실제로 집행한 정책은 신자유주의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공공주택으로 집값 상승을 억제하고, 공교육으로 사교육비를 억제하고, 의료보험을 확대했습니다. 학력 차별에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대응한 첫번째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소득주도성장론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보다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시도하고 기초 연금을 크게 늘렸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보수 정부가 매 순간 차갑지만은 않았습니다.

문제는 담론이었던 것 같습니다. 멀리서 보면, 우리나라 보수 진영은 말과 행동이 달랐습니다. 말로는 자유방임과 작은 정부를 따랐지만, 행동으로는 개혁적인 보수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런 차이는 보수 진영이 이질적인 조합으로 이뤄진 탓에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 보수 진영은 현장에서 활동하는 정치인과 보수 담론을 주도하는 식자층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보수 식자층은 모순되고 정제되지 않은 담론을 공유하고 있지만, 역사 깊은 보수 정당과 소속 정치인을 (미우나 고우나) 지지합니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보수 정치인은 정권 유지에 필요한 실용적인 정책과 보수 담론 사이에서 유행하는 담론 사이에서 타협해야 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둘 사이에서 균형을 지키려 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실용에 좀 더 무게를 뒀습니다. 통속적인 의미의 실용주의와 보수 담론 사이의 공존이 우리나라 보수주의의 모습이었습니다.

최근에는 통속적인 실용주의와 보수 담론 사이의 균형이 무너졌습니다. 기존 정치권에 참여한 적 없는 윤석열 대통령은 보수 전통에서 벗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보수 정치인은 집권이라는 현실과 보수 담론이라는 이념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이념에 진심이었습니다. 경제가 위태로워져도, 출산율이 매년 기록을 갱신해도, 청년이 희망을 잃고 자살해도, 윤석열 대통령은 건전한 재정과 규제 완화라는 보수 담론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보수 담론에 꽤나 충실한 정부를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보수주의가 언제나 자유방임주의와 작은 정부를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냉전 이후에 발전한 지류일 뿐, 보수주의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본류가 아닙니다. 지금 유행하는 보수주의는 일부 정치 유튜버의 이익에나 부합하는 생각일 뿐, 정치사상적인 근거가 탄탄한 담론이 아닙니다. 민주당 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보수도 꽤나 퇴보했습니다.

"우리는 자유 경쟁이 위로 향하는 것을 원한다. 자유 경쟁은 사회가 하향 곡선을 걷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사회와 문명의 구조를 끌어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심연을 건너갈 때 그물을 치는 일은 해야 한다."
- 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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