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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May 31. 2023

울타리를 만든 이유를 모른다면.

대의원제, 폐지하면 안 됩니다.

'권리당원만으로 당대표를 선출한다.' 어찌보면 민주당과 어울리는 것 같다. 권리당원이 대의원의 간섭 없이 지도부를 뽑는다는데, 이보다 민주적인 일이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다수결은 전부가 아니다. 임기와 권한을 보장받는 지도자를 다수결로 선출한다고 해서 그 조직이 민주적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대의원의 힘을 뺀다고 해서 민주당이 더 민주적인 정당이 되지는 않는다.

일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점수를 계산할 때 소수 전문가의 이견이 다수 시청자와 비슷한 비율로 반영된다. 이런 시스템에는 한 가지 장점이 있다. 시청자 의견만 물을 때보다 더 공정한 경쟁 환경을 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실력을 겨뤄서 우승자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미 어디선가 유명한 사람은 다소 실력이 부족하더라도 기존 팬덤 덕에 많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모든 시청자가 합리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투표에 참여하는 시청자 중에는 '팬덤'에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팬덤은 가장 열정적으로 방송시간을 지키다가 자신이 원하는 후보를 맹목적으로 고를 것이다. 이미 우리는 팬덤이 자기만의 아이돌을 위해 얼마나 열정적으로 돌변하는지 알고 있다. 연예인이나 인터넷 방송인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팬덤은 무조건 자기만의 스타를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팬덤 탓에 인터넷에서 집단린치가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팬덤은 합리적인 개인들의 집단이 아니라,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서로 긴밀히 소통하며 집단 행동에 참여하는 군단이다.

팬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청자 점수만 반영한다면, 과연 오디션 참가자들이 실력에 비례해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경쟁만 즐기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오디션이 실력에 비례해서 보상하는 것처럼 보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팬덤의 영향력을 무시하면 오디션 프로그램 자체가 망가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전문가 집단이 시청자 집단을 견제해 준다면, 오디션 참가자가 팬덤의 힘에 비례해서 높은 점수를 얻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물론 오디션 프로그램이 스스로 부패를 예방하기 어려운 만큼, 전문가도 실력 좋은 후보보다는 같은 소속사인 후보에게 점수를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견제 장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크다. 아마 이런 이유 탓에 대부분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소수 전문가의 점수를 우대하는 게 아닐까. 시청자 점수만으로 우승자를 뽑을 때보다, 전문가 점수와 시청자 점수를 50%씩 반영할 때, 경쟁은 공정해진다.

민주주의가 잘 기능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경쟁을 통해 유능한 사람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특정 집단이 맹목적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단순다수결로 지도자를 선출한다면, 그 사회는 유능한 지도자를 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충성스런 민주주의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능한 시스템을 용납하지 않는다. 불공정해서 재미 없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망하는 것처럼, 무능해서 고통스러운 민주주의는 그 주인들에게 외면받을 것이다.

대의원제가 폐지되면, 그 여파는 단순히 당대표 선출 규칙이 바뀌는 선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민주당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단순다수결을 견제할 대의원이 사라진다면, 민주당은 이름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도 경쟁이다. 민주적인 사회에서 선거는 더 유능한 후보를 찾는 오디션과 같다. 자리는 하나 뿐인데 후보는 여럿이라면, 경쟁을 통해 더 어울리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민주주의는 존속할 수 없다. 공정하지 않다면, 민주적이지 않은 셈이다.

"울타리를 만든 이유를 모른다면, 부수지 말라."
- 길버트 체스터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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