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
지하철이 구글 시간과 안맞는 것 같았다. 여기서 기다리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또 아까처럼 실수로 다른방향으로 가버려서 비행기를 놓치면 더더욱 안될테니깐. 들어오던 외국인에게 내 티켓을 보여주었다. 그 외국인은 잘 모르겠는지 바로 옆에 있던 또 다른 독일인에게 내 이야기를 해주고 갔다.
"한국인이세요?"
갑자기 그 외국사람이 익숙한 한국어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국어 너무 잘하세요!"
"아니에요~~ 저 못해요^^ 저 한국드라마 좋아해서요!" "나만 믿고 따라오세요~"
정말 신기하고 반가웠다. 못한다고 해도 발음이 한국인스러웠다. 지금 지하철이 지연되고 있어서 바로 공항가기는 어렵고 중앙역에 내려 환승해야 된다고 하셨다. 본인도 중앙역으로 가고 있는 도중이니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중앙역 역무원께 이분 공항 가는 길이니 잘 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시고 가셨다. 정말 친절하셨다. 말이 막히면 한국어 번역기 돌려서 나에게 보여주셨다. 연락처 교환했었어야 했는데.. 정작 그 상황이 되면 정신없고 현실적인 문제만 보여서 생각할 수가 없다.
비행기 출발시간 얼마 안남았다. 이제야 드디어 친구집으로 간다. 한번 캔슬되어서 그런지 더 더욱 보고 싶고 간절해졌다. 뒤셀도르프에 가본 적도 없는데 내 집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게이트 앞에 있는 사람들이 작은 가방을 들고 서있었다. 다른 비행기는 캔슬이 되었는지 서비스센터 쪽에 엄청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어제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다행이야. 저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아서'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느낌이 안좋았다. 이미 시간은 지체되었고 나와 같이 기다리는 외국인들이 모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어떠한 이유 때문에 게이트 안으로 한,두명 들어갈 수 있게 해줄때면 사람들은 희망을 본 듯 환희의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시무룩해지곤 했다. 표정만 보면 같이 월드컵 경기를 보고있는 것 같았다. 사실 지연이 문제가 아니고 캔슬이 될까 노심초사였다. 그렇기 때문에 빨리 가고 싶어하는 마음은 똑같았다. 드디어 그룹 순서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비행기 탑승 문을 열어주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도 이제 간다고 친구한테 문자했다. 드디어 비행기 안에 앉았다. 내 자리는 창가 쪽이었다. 행복했다..
잠시후 내 옆에는 외국인 아주머니가 앉으셨다. 취소 알림문자를 나한테 보여주며 여기 취소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처음엔 바로 못 알아들었다. 지금 비행기 안에 앉아있는데 설마 여기가 취소라니. 말도안돼.
"우리요?"
"그래. 맞아."
" 왜..."
이윽고 비행기 안에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폭설로 인해 뮌헨공항의 모든 비행기가 취소되었다고 말이다. 난 보이스톡으로 친구랑 현상황을 공유했다. 사실 옆에 계신 아주머니가 답답함을 나와 공유하고 싶었는지 아까부터 빤히 쳐다보셨는데 영어대화에 울렁증이 있어서 보이스톡을 못끊었다. 다시 터덜터덜 나와서 공항 의자에 풀썩 앉았다. 어디 가지도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빈 이 공항 안이 너무도 갑갑했다. 끝이 안보이는 저 기다란 줄에 서서 기다려야 할까..? 저 긴 줄을 또 기다리고 서 있으면 어제처럼 직원들 가버리고 내일 오라고 하는 건 아닐까? 비행기는 언제 뜰 수 있을까? 꼭 비행기를 타야할까? 하루하루 여행스케줄 다 잡고 기대에 부풀었는데 속절없이 흘러가는 이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어제처럼 어플을 사용하여 고객센터에게 몇번이나 채팅해보려했지만 이미 공항이 마비상태라 아무 답이 없었다. 그래서 독일기차(DB) 시간표를 찾아보게 되었다. 기차를 타도 6시간 이상 걸리긴 하지만 당장 앞으로 어떤 하루를 보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다림보단 나아보였다. 기차시간이 얼마 안남았기 때문에 길게 고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빠른 결정을 내리고 서둘러 결제를 했다. 근처 마트에 들어가 간단하게 먹을 것들. 바나나, 물, 초콜릿과 치약을 샀다. 칫솔을 사고 싶었지만 칫솔이 없었다. 다른분들도 허공에 손가락질만 둥둥하다 못찾고 가버렸다. 마트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재난영화에서 본 장면 같았다. 그동안 몇일 이를 안닦아서 원시인 같았다. 급한대로 치약에 손가락을 사용하여 이를 닦아보니 차라리 혀가 나았다. S반 기차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탑승했고 그 사이에 나도 덩달아 끼어 탔다. 이 기차를 타는 데도 앞선 열차에 문제가 생겨 살짝 지연이 있었다. 예약했던 DB기차를 못탈까봐 걱정되었으나 다행히도 DB 환승역에는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이 제일 문제였다.
그동안 대중교통 잘만 이용했는데..여기 역은 왜이렇게 복잡하게 생겼담.. 어디 환승구로 가야될지 도통 감이 안잡혔다. 보통은 숫자확인해서 들어가는데 같은 숫자가 저 앞에도 있고 저 뒤에도 있었다. 바깥에 나와있는 역이라 몹시 추웠다. 정신없이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어떤 봉변당할지 몰라 무서웠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질문을 하게 되었다. 어떤 여자분이 정확하진 않지만 여기일거라고 가르쳐주셨다. 그 위로 에스컬레이터 타고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열차가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내옆에 있던 남자들이 눈으로 상대편 역의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장난이라 생각해서 웃었지만 그 근처에 있던 몇몇의 사람들이 피해를 받아 화를 냈다. 그만하라 외치는 데도 청년들의 눈싸움은 멈출 줄 몰랐다. 큰 싸움로 불어나고 휘말리게 될까 두려워 다시 내려오게 되었다. 이 상황 속에서 여기저기 깔깔깔깔 하고 떠들썩하게 웃는 소리가 왠지 술에 취한 것 같아보였다. 나처럼 혼자 있는 사람 게다가 동양인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안보였다. 기다리고보니 내가 예약한 DB기차가 취소되었다고 뒤늦게 나왔다.
밤 12시쯤 되었고 나는 근처 숙소를 알아보았다. 이 새벽에, 사실 역밖으로 나가기도 무서웠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제일 가까운 숙소를 예약하고 가보았다. 패딩모자를 눌러쓰고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앞에 외국인 무리들이 내 앞을 지나갈 때면 움찔했지만 더 당당하게 걸었다. 숙소 앞에 있던 외국인들이 역쪽으로 돌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나 역시 가보니 그 앞에 서 있던 직원이 "투데이, 노우!" 강하게 외치고는 못 들어가게 막았다. 나 역시 다른 외국인들처럼 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시끄러운 외국인 무리가 무서워서 역쪽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저 멀리 불빛이 켜져있는 카페가 보여 가까이 가보았다. 역시나 들어갈 수는 없었다. 문 옆에 쭈그리고 벽에 기대어앉았다. 아까 샀던 바나나, 초콜릿, 물 차례대로 먹었다. 이거라도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나마 이곳이 안전하다 느꼈지만 손과 발이 동상걸리거 같아서 버티기 힘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 머리가 안돌아가는 것 같다. 떠나지 말고 공항에 있을 걸.. 시내 안에 있을 걸.. 한국에 있을 걸..
내 선택으로 인해 내 자신에게 이런 큰 책임을 지게 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