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로 읽은 정유정 작가님의 작품이다. 정유정 작가님의 소설 중 가장 최근에 나온 작품인데 엄청난 소설이었다. 작가님의 차기작이 기다려지는 작품이었다.
주인공 한유진은 어린 시절 수영 선수의 꿈을 꾸었지만 약을 먹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발작이 일어나는 병 때문에 어머니의 반대로 꿈을 접는다. 그리고 차선책으로 로스쿨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던 한유진은 로스쿨 시험을 위해 발작을 막아주는 약을 끊은 상태로(약을 먹으면 발작은 일어나지 않지만 몸 상태가 평소보다 안 좋아진다.) 며칠간 지내다 발작의 부작용으로 전날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채 방 침대 위에서 눈을 뜬다. 온몸이 흙탕물에 젖은 상태로 눈을 뜬 한유진은 자신이 평소처럼 어젯밤 어머니 몰래 밖에 나갔다가 발작이 일어나 넘어지는 바람에 흙탕물에 온통 젖었다고 생각했지만 방 불을 켜고는 사실 온몸과 방을 적신 액체는 피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거실에는 어머니가 목이 칼에 베인 상태로 쓰러져 있다. 범인이 누군지 알아내려던 한유진은 자신이 범인임을 가리키는 증거들을 확인하고 패닉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친형 한유민과 아버지가 어릴 적에 죽은 후 입양된 형제 해진은 전화를 통해 어머니가 연락이 안 된다며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유진을 재촉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기억도 하지 못한 채 억울하게 이 상황을 해진에게 보일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일단 어머니의 시체와 집의 핏자국들을 수습한 유진. 한유진은 사라진 어젯밤 기억을 찾아가다 어젯밤 일 뿐 아니라 어머니, 친형,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비밀들을 천천히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필자는 이 책에서 사이코패스인 주인공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책을 읽기 시작했음에도 초반에는 주인공이 사이코패스라는 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주인공이 평범한 일반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런 일이 벌어진 것이 불쌍할 정도였다. 병으로 인해 기억도 나지 않는 상태로 벌인 일이 아닌가. 술 먹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람들은 가중 처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몸이, 정신이 좋지 않아 생긴 일이니 연민이 느껴졌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나가면 갈수록 뭔가 이상했다. 주인공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거슬리기 시작하고 뭔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주인공이 밤마다 밖을 나가는 이유를 알게 되고는 깨달았다. 아, 한유진은 사이코패스구나. 그때부터 앞에서 쓰였던 주인공의 말, 행동들이 가지고 있는 묘한 어긋남이 생각나면서 정유정 작가님의 뛰어난 필력과 사이코패스에 대한 철저한 조사에 대해 감탄했다.(예를 들면 해진과 어머니가 불편하게 보던 영화를 신나게 웃으며 보던 주인공의 모습 같은 것.) 사실 어머니의 시체를 보고 주인공이 당황하고 패닉에 빠졌던 것도 자신이 어머니를 죽였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자책감이 아니라 자신이 왜 이런 짓을 저질러서 자신의 미래를 망쳐놓았는지에 대한 후회에 가까운 듯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이제야 고삐가 풀린 듯 한유진의 내면을 깊이, 더욱 깊이 파고들어가기 시작한다. 사이코패스란 어떻게 사고하고, 어떤 경로로 생각을 거쳐 이러한 사건을 저질렀는지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데 그 묘사가 진짜 사이코패스가 서술한 것처럼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공감하기 어려웠다. 정유정 작가님이 사이코패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조사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주인공의 엄마는 주인공이 바다로 자신의 형 한유민을 밀어버린 것을 보고 청소년 행동 전문의인 이모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이모는 주인공이 사이코패스라는 결론을 내리고 약을 통해 주인공의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조절하기로 한다. 지금까지 발작을 억제하는 약인 줄 알고 먹어왔던 한유진은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분노한다. 그리고는 엄마와 이모가 자신에게 죽은 것은 자신을 속이고 약을 먹여왔으니 당연하다는 식으로 사고한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저런 상황에서는 억울함과 함께 자신이 정상적인 사회에 적응하여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을 알고 어느 정도 납득하겠지만 사이코패스는 그게 되지 않는 것이다. 자신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모습과 그 사고의 흐름이 적나라하게 사이코패스의 머릿속을 보여준다.
그런 주인공도 해진에 대해서는 친형과 같은 애정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사이코패스의 감정은 역시 일반적인 사람과는 달랐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해진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처분을 기다리는 듯한 주인공의 모습에서 사이코패스라도 인간적인 부분이 있구나라고 느끼고 가슴 한구석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완전무결한 악을 보고 있을 때 느껴지는 인간적인 슬픔과 괴로움이 조금은 사그라지는 듯했다. 그래, 주인공도 인간인 이상 저런 부분이 있겠지, 완전한 악인은 아니겠지 하고 연민을 느끼려는 찰나 주인공은 그 기대를 보란 듯이 배신한다. 결국 해진에 관한 애정도 얄팍한 놀음에 지나지 않았다. 해진은 유진에게 자수를 권한다. 그래야 자신이 뭐라도 해볼 수 있다고, 네가 죗값을 치르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그런 해진을 보며 유진은 생각한다. 결국 너도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하고. 여기서 사이코패스란 어떤 존재인가를 뼛속 깊이 체감했다. 필자라면 자수하라는 해진의 말속에 담긴 애정과 슬픔, 안타까움을 느꼈겠지만 유진은 그게 선천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한국을 벗어나 도망치려는 자신을 자수하라고 몰아가며 감옥에 보내려는 해진은 유진에게는 그저 해로운 존재일 뿐인 것이다. 유진은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해진마저 죽음으로 몰아넣고 도망친다. 이제는 분노가 아니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인간다운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없게 태어난 존재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이.
유진의 이모가 검사를 끝내고 말했다. "유진이는 포식자야.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 그 말은 유진에 대한 예언이었다. 유진은 결국 자신의 옆에 있던 어머니와 이모, 해진까지 모조리 잡아먹고는 태연히 살아남아 대로를 활보하고 있다. 바로 지금, 포식자가 우리 옆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