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재밌다. 딱히 다른 수식어를 붙일 것도 없이 거의 백과사전만한 두꺼운 책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릴 정도로 재밌다. 도대체 처음 보는 이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책을 다 읽고 한참 인터넷을 뒤지고 다녔다. 그냥 읽어보라. 책의 두꺼움에 대한 생리적 불안은 잠깐 저쪽으로 치워두고 딱 앞의 50페이지만 읽어보면 책을 들고 있는 손을 놓지 못할 것이다.
별 대단한 스토리도 없다. 엄청난 반전이나 손에 땀을 쥐는 스릴러도 없고 실험적이고 새로운 시도도 딱히 없다. 그냥 요시가에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출전한 네 인물의 콩쿠르 출전기를 주욱 따라간다. 신기한 점은 그 인물들의 피아노 연주를 직접 듣는 것도 아니고 글로 읽을 뿐인데도 팔에 소름이 돋는다. 재능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재능이 있는데 그것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자와 재능이 없지만 그것을 필사적으로 원하는 자,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자신이 음악의 신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로 피아노를 시작해 그 검은 악기에 사로잡혀 주위를 떠날 수 없는 자들이 서로 부딪히고 위로하고 절망하고 감탄하고 경쟁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좌절하고 나아가는 이야기가 이 두꺼운 책 속에 빼곡히 들어있다. 필자는 이 책을 보고 나서 피아니스트라는 사람들의 공연을 너무나도 보고 싶어졌다. 그들의 빛나는 무대와 그 뒤에 숨은 수천수만번의 연습과 자신의 한계에 대한 좌절과 그럼에도 아름다운 선율을 듣고 같이 느끼고 싶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네 주인공은 각자 특징이 있다. 가자마 진은 제대로 된 피아노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콩쿠르도 첫 출전이지만 그 동안 본 적 없는 재능과 연주로 콩쿠르를 충격에 빠뜨린다. 에이덴 아야는 어린 시절 천재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다 돌연 잠적해버리고 그 뒤로 처음으로 참가하는 공식 피아노 무대가 바로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이고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은 줄리어드 음대에서 유명한 스승에게 사사받고 피아니스트로써 엘리트의 길을 걸어왔다. 다카시마 아카시는 학창시절 피아니스트를 꿈꿨지만 자신의 부족한 재능을 인정하고 대형 악기점의 회사원으로 일하다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늦은 나이에 콩쿠르에 출전한다.
필자가 가장 끌렸던 주인공은 다카시마 아카시였다. 언더독 효과 때문일까.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었던 사람이 늦은 나이에 회사를 다니면서도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연습해 콩쿠르의 1차 예선을 통과했을 때에는 나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그렇지 라고 외치고 있었다. 다카시마 아카시는 가자마 진, 카를로스, 아야 같은 반짝거리는 재능의 소유자들은 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의 음악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의 음악. 참 따뜻하고 정감 있는 말이면서도 잔인하기도 하다. 자신에게 저런 빛나는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수 있는 그런 말이다. 나는 평범하다. 나는 보통 사람이다. 나는 저렇게 빛나는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다. 그것을 마음 속으로 수긍하고 그 앞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할 수 있는 말이 바로 보통 사람의 음악을 하겠다는 결심이다. 필자는 다카시마 아카시는 빛나는, 화려한 피아니스트는 아직 아니더라도 사람으로서는 이미 빛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가자마 진의 충격적인, 악마에 가까운 재능이나 카를로스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자에게서 뿜어지는 스타 피아니스트의 기운도 좋았지만 다카시마 아카시 다음으로 정이 가는 캐릭터는 에이덴 아야였다. 엄청난 재능이 있으면서도 어릴 적 피아노 무대에서 도망치고 그 뒤 피아니스트의 길을 애써 외면하던 아야. 주변에서 아무리 너에게는 재능이 있어 라고 이야기해도 의심하고 믿지 못하던 아야는 콩쿠르에 출전하기로 결정하고도 계속해서 불안에 떤다. 1차에서 떨어지면 어떡하지, 나는 카를로스나 가자마 진 같은 재능이 없는데, 막상 피아노 앞에서 머리가 하얘지면 어떡하지. 그렇게 불안에 떨고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신을 의심하던 아야가 가자마 진과 카를로스, 다카시마 아카시의 연주를 통해 자극받으며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욕망, 저 속에 잠들어 있던 피아노에 대한 감정, 도망치고 싶은 자신의 마음, 외면하고 있던 재능을 찾아가고 발견하고 때로는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나아가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빛을 발산하게 되는 모습은 늘 아름다운 법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냥 책을 집어들고 읽어라. 사실 이 책에 대해 할 말은 그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