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일들에 한동안 바쁜 하루를 보내다 오랜만에 짬이 나서 집어 든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스티븐 킹의 '엔드 오브 왓치'. 그동안 스티븐 킹의 소설을 한 번쯤 읽어보고 싶기도 했고(영화로는 꽤 많이 접했지만 소설은 처음이었다.) 바쁜 일상에 지쳐 너무 어둡고 무거운 소설보다는 쉴 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고 싶기도 했기에 이 책을 골랐던 것 같다. 꽤나 탁월한 선택이었다.
필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엔드 오브 왓치를 먼저 읽었지만 사실 이 소설은 빌 호지스라는 형사가 주인공인 탐정 추리 소설 3부작의 마지막 3부였다. 1부인 '미스터 메르세데스'와 2부인 '파인더스 키퍼스'에 이어지는 3부로써 탐정 추리 소설 메르세데스 3부작의 완결 편이 바로 '엔드 오브 왓치'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읽었음에도 충분히 재미있었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없었다.
대량 살인을 계획했던 범죄자 브래디 하츠필드가 뇌를 크게 다쳐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는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주인공인 전직 형사 빌 호지스는 자신의 파트너인 홀리 기브니와 함께 과거 브래디 하츠필드가 계획했던 대량 살인을 저지하고 그의 머리를 볼베어링이 담긴 양말로 후려쳐(홀리 기브니의 작품이다.) 브래디 하츠필드를 거의 뇌사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브래디 하츠필드는 제대로 된 재판을 받을 수 없는 정신 상태라는 이유로 병원에서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다 예전 브래디 하츠필드가 일으킨 무차별 테러에 당해 전신마비가 된 한 여인과 그의 어머니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전에 알던 형사에게 전해 들은 빌 호지스는 홀리 기브니와 함께 자살 현장을 방문하고 이상한 직감을 느낀다. 이 사건에 브래디 하츠필드가 관련되어 있는 듯한 강한 직감을. 그렇게 꺼림칙한 느낌을 지우지 못하고 있던 빌 호지스의 지인 중 한 명이 자살 소동에 휘말렸다 겨우 살아남게 되는데 그 현장에서 앞선 모녀 자살 사건 현장에서 발견했던 재핏이라는 레트로 게임기를 또다시 목격하게 된다. 그 뒤 브래디 하츠필드가 입원해 있는 병원의 간호사들이 연달아 자살을 한다. 계속해서 일어나는 자살 사건 현장들에서 항상 목격되는 똑같은 모양의 레트로 게임기 재핏. 빌 호지스는 강한 직감으로 이 사건이 단순한 자살 사건이 아니라 계획된 자살 유도 범죄라고 보고 파트너인 홀리 기브니와 수사에 착수한다. 그 과정에서 확보한 여러 증거들은 점점 병실에 누워있는 브래디 하츠필드가 범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사실을 가리키기 시작한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위와 같다.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브래디 하츠필드라는 범죄자와 전직 형사인 빌 호지스, 그리고 그의 파트너 홀리 기브니 간의 대결이 주된 내용이다. 할리우드가 사랑하는 소설가, 스티븐 킹의 소설인만큼 한 번 잡으면 놓기가 힘들 정도로 몰입감이 대단하다. 쉴 새 없이 사건들이 일어나고 앞서 일어났던 사건들과 뒤에서 나온 증거들이 합쳐지며 흥미를 자극한다. 또한 빌 호지스가 진상을 파헤쳐 가는 것과 별개로 브래디 하츠필드가 자신의 범죄를 완성해나가는 방법 또한 대단히 치밀하고 창의적이다. 브래디 하츠필드는 뇌사 상태에서 깨어나고 회복하면서 두 가지 초능력을 얻게 되는데 염력과 사람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마치 자신이 그 사람이 된 듯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한 능력으로 대규모 자살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치밀한 작전을 짜고 수행하는 브래디 하츠필드의 모습은 빌 호지스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노력과 대비되며 긴장감과 몰입감을 유발한다.
이 소설이 대단한 점은 그러한 이야기의 오락적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문제인 자살, 특히 10대들의 자살이라는 문제를 재밌고 흥미로운 스토리 속에 녹여냈다는 것이다. 10대들이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와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이미 10대를 지난 필자가 도대체 왜 10대들이 자살을 하는지, 지금 보기에는 사소한 문제들(성적, 친구관계, 연애 문제)이 10대들에게는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고 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필자도 읽으면서 10대 때 성적이 떨어졌을 때, 친구와 관계가 멀어졌을 때 얼마나 큰 좌절과 절망을 했었는지 어렴풋이 다시 상기하게 되었다. 이 소설을 통해 지금 시대 청소년들의 생각이 어떤지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 듯하다.
물론 아쉬웠던 점이 없지는 않다. 브래디 하츠필드가 가지게 된 두 능력 중 염력은 후반으로 갈수록 거의 등장조차 하지 않고 개조한 게임기 영상이 가질 수 있는 최면 효과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이 의문이 들었다.(이는 공대생이라는 필자의 신분 때문일 수도....) 이 소설의 초반부에서는 전혀 초능력 같은 SF 적인 요소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을 못하고 있다가 중간에 브래디 하츠필드가 초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설정이 나오면서 필자가 기대했던 현실에 바탕을 둔 범죄자와 전직 형사의 치밀한 두뇌 싸움보다는 "병실에 누워있는 범죄자가 범죄를 일으킨 방법은 바로 초능력이었습니다!" 같은 느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바람에 약간 김이 빠진 면도 있었다. 오히려 브래디 하츠필드가 사이코패스의 특징인 뛰어난 언변으로 주위 사람을 구워삶고 협박해 뒤에서 조종하며 일으킨 범죄의 증거를 빌 호지스가 하나하나 파악하고 추적해가며 결국 브래디 하츠필드가 범인이라는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필자의 취향으로는 더 재미있게 읽었을 것 같다.(셜록 홈즈가 말한 "불필요한 일들을 제거하고 나면 아무리 불가능한 것이 남더라도 그것이 진실이라네." 같은 진행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초능력은 그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니까.)
스티븐 킹은 주제를 먼저 정하고 스토리를 짜지 않는다고 한다. 늘 스토리를 짜다 보면 자연스럽게 주제가 정해진다고 하는데 이 '엔드 오브 왓치'가 그러한 스티븐 킹의 일면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자살이라는 사회적인 문제를 말하기 위해 억지로 짜낸 스토리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뿐더러 그저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살이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쉴 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페이지 터너에 빠져 여가 시간을 즐기고 싶다면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한다.(필자도 1부 '미스터 메르세데스'와 2부 '파인더스 키퍼스'를 조만간 읽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