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노래' / 김훈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칼의 노래 이후 필자가 두 번째로 읽은 김훈 작가의 소설이다. 김훈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어떻게 이렇게 문장을 구사할 수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 한 문학평론가가 김훈 작가에 대해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세대의 몇 안 되는 글쟁이 중 하나'라고 평했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철저히 절제되고 다듬어진 문장은 마치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현의 노래는 망해가는 가야의 악사 우륵이 가야금(가야의 소리를 담은 금)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그런데 막상 우륵이 가야금을 만드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고 볼 수는 없다. 죽어가는 가야의 황제와 가야를 배신한 태자, 신라와 백제, 고구려의 군대 사이에서 허덕이는 가야의 병졸들과 백성들, 가야의 모든 쇠를 다루면서 그 쇠로 만든 무기를 황제 몰래 신라에 넘기는 대장장이 야로, 황제와의 순장을 피해 도망친 시녀 아라까지 수많은 인물들과 그 당시 무너져가는 가야의 모습이 우륵이 가야금을 만드는 과정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김훈 작가는 가야금을 만드는 과정보다 다른 것들에 더 많은 문장과 시간을 할애했을까?
그 이유는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며 생각한 가야금의 의미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륵은 열두 현이 달린 가야금에 가야 모든 고을의 소리를 담으려 한다. 물혜, 달기, 다로, 가라 등등 가야의 여러 고을들의 소리를 담기 위해서는 그 고을들이 어떤 곳이었으며 지금의 모습은 어떤지, 현재 가야의 정세는 어떻고 가야는 어떤 나라였으며 지금 망해가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우륵이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그 과정을 목격해야 우륵이 가야의 모든 소리를 담아 만든 가야금이라는 악기의 의미를 우륵 자신은 물론 독자들에게까지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기에 망해가는 가야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 것이 아닐까. 그 모든 가야의 모습을 앞의 긴 여정을 통해 보아 온 독자들이기에 완성된 가야금이 우륵의 손에서 소리를 낼 때 망한 나라의 소리를 담은 악기와 그 악기를 만든 우륵의 감정, 사라진 나라에 대한 아련함, 신라에서 연주되고 신라에 의해 멸망한 가야의 소리를 담은 금의 처연함까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 주요한 인물 중 하나인 대장장이 야로의 쇠에 대한 생각과 우륵의 소리에 대한 생각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장면도 인상 깊었다. 쇠는 누구의 것도 아니므로 그 흐름을 따를 뿐이라는 야로와 소리는 우리가 빌려 쓰고 허공에 돌려줄 뿐이라는 우륵의 모습은 일견 비슷하나 자세히 보면 꽤 다르다. 적극적으로 쇠의 흐름을 따르며 신라, 심지어 백제와 고구려에게까지 신형 무기를 몰래 넘기는 야로와 빌려 쓰는 소리를 조심스럽게 다루며 금 하나를 새로 만들기 위해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우륵. 소리를 얕보던 야로는 결국 이사부의 손에 죽고 우륵은 신라에서 가야금의 소리를 전한다. 둘의 대비에서 느껴지는 소리와 쇠의 끝은 묘한 울림이 있었다.(펜과 칼의 대비 같은 느낌도 있었다.)
김훈 작가의 소설에서는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거의 없다. 기뻤다, 슬펐다, 분노했다 등의 감정 묘사는 물론이고 억척스럽다, 착하다, 의연하다 등 성격을 묘사하는 단어는 아예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경 묘사와 대화를 통해서 인물의 감정과 성격을 모두 표현해 낸다. 직접적인 묘사 없이 인물에 독자가 이입하게 만들고 이 인물이 어떤 성격인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까지 표현해 내는 김훈 작가의 문장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군더더기 없이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그 솜씨를 그저 배우고 싶을 뿐이다.
전에 읽었던 칼의 노래에 뒤지지 않는 좋은 작품이었다. 오히려 소리에 대한 풍부한 묘사와 거기서 느껴지는 감정들은 칼의 노래보다도 풍성한 면이 있었다. 김훈 작가의 소설은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현의 노래가 아니더라도 김훈 작가의 글은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소설 속 한 문장 : "너희들의 나라가 삼한을 다 부수어서 차지한다 해도 그 열두 줄의 울림을 모두 끌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늘 새롭고 낯설지 않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