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동물원' / 강태식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사람답게 사는 건 힘들다. 특히 지금 사회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사람만도 못한 짓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동물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능청스럽고 발랄한 문체로 그리는 동물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웃겨서 더 슬프다.
회사에서 정리 해고를 당한 영수. 부업을 하며 어떻게든 돈을 벌어보려 하지만 아내와 둘이 살아가기에 부업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한없이 부족하다. 그 때 부업을 알선해주는 돼지 엄마가 정보 하나를 건네준다. 시에서 하는 동물원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것이다. 시에서 하는 일이라 거의 공무원이나 다름없고 정보도 알음알음으로 전해지는 식이라 경쟁자도 별로 없을뿐더러 조건도 체력 테스트뿐. 영수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체력 테스트를 준비하고 결국 경쟁자인 아줌마를 물리치고 합격하게 된다. 기쁜 마음으로 세렝게티 동물원에 첫 출근을 한 영수에게 직원이 검은 털 옷을 건넨다. 일단 입으라는 직원의 말에 검은 털옷을 입은 영수는 검은 마운틴 고릴라가 된 자신을 목격한다. 영수의 일은 사육사나 직원이 아니라 마운틴 고릴라다. 검은 털옷을 뒤집어쓰고 우리 안에서 가슴을 두드리며 포효를 내지르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라 불리는 철근 구조물에 올라가는 일이 주 업무다. 관람객들이 원하는 마운틴 고릴라를 연기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영수는 이래도 되는가 고민하지만 당장 돈이 필요하니 어쩔 수가 없다. 매일 아침 검은 털옷을 뒤집어쓰는 영수 앞에 파란만장한 마운틴 고릴라의 여정이 펼쳐진다.
세렝게티 동물원의 모든 동물들은 사실 사람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제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기꺼이 동물의 탈을 뒤집어쓰고 동물이 된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사람답지 못한, 동물 같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탈을 뒤집어쓰고 동물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 게다가 더 동물처럼 행동할수록 더 많은 돈을 받는다. 마운틴 고릴라가 된 영수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 숨겨져 있는 버튼을 누를 때마다 받는 돈이 올라가는 것처럼. 더 자주 철근을 타고 올라가 더 많이 가슴을 치고 포효할수록 받는 돈의 액수는 올라간다. 동물처럼 행동할수록 더 많은 돈을 받고 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사람과 동물의 경계가 헷갈리기 시작한다.
영수의 마운틴 고릴라 동료들 이야기는 더 가관이다. 유일한 여자 고릴라인 앤과, 조풍년, 만딩고. 이 셋은 영수와 함께 마운틴 고릴라의 탈을 쓰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 포효하는 고릴라 동료다. 세 명의 사람이자 마운틴 고릴라는 어떻게 이 동물원으로 흘러오게 됐을까.
우연히 동물원 밖, 도서관에서 만나게 된 앤은 영수에게 자신이 9급 공무원을 준비하며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는다. 수백 대 일의 경쟁률에 매번 좌절하는 앤에게 9급 공무원 준비 5년째인 베테랑 영희 언니가 찾아온다. 영희 언니는 5년 동안 쌓인 온갖 노하우들을 앤에게 알려준다. 무협 소설의 무술 이름들을 딴 비기들이 영희 언니로부터 앤에게 전수된다. 동귀어진, 죽음을 각오하고 시전 하는 무공. 항상 식칼을 들고 다니며 이번 시험에 떨어지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임해라. 고형척영, 홀로 있으니 따르는 것은 그림자뿐. 도서관의 모두를 경쟁자라고 생각해라. 금강불괴, 어떤 해도 입지 않는 극강의 신체.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공부만 생각해라, 허리가 아프고 팔다리가 뻐근하고 화장실이 가고 싶어도 참아라. 그래야 합격한다. 앤은 영희 언니의 비기들을 하나씩 익히면서 점점 공무원 시험 외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마음을 잃어간다. 감정과 표정이 사라졌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공무원이 되고 싶은 건데 공무원이 되려면 사람의 마음을 버려야 한다. 결국 앤은 버티지 못하고 영희 언니에게 이별을 고한다. 일련의 이야기를 듣고 앤에게 측은한 마음을 느끼던 영수. 다음날 영수는 앤의 본명이 영희라는 걸 알게 된다.
조풍년 씨는 굴지의 대기업, WXY 전자의 과장이었다. 조풍년 씨는 구조조정에서 살아남고 싶으면 평사원 두 명을 정리 해고시키라는 강 부장의 지시를 받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두 명의 사직서를 받아낸다. 그 실적을 눈여겨본 강 부장은 조풍년 씨를 오물 처리반에 임명한다. 점조직으로 이뤄진 오물 처리반 중 유일하게 정체를 알고 있는 남 과장과 함께 위에서 내려온 살생부 명단에 있는 사람을 회사에서 쫓아내는 일을 하게 된 조풍년 씨. 조풍년 씨는 살생부 명단에 적힌 사람의 구린내가 나는 부분들을 캐내 회사 홈페이지에 올린다. 공금횡령, 불륜, 뇌물수수 등등. 그렇게 다른 사람을 죽여가며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던 그에게 아내와 딸이 말한다. 당신 얼굴이 옛날 같지 않다고, 너무 무섭다고. 며칠 뒤 아내와 딸은 가출하고 조풍년 씨는 지하주차장에서 자신이 처리했던 장 대리에게 배에 칼을 맞는다. 한 달 뒤 회사에 출근한 그는 오물 처리반 일을 그만두겠다고 강 부장에게 통보한다. 바로 다음 날 회사 홈페이지에는 조풍년 씨가 경리부 이숙자 씨와 내연관계라는 글이 올라온다. 조풍년 씨는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나 세렝게티 동물원에 들어오게 된다.
만딩고는 남파 간첩이다. 북에서 엄청난 훈련들과 목숨을 건 테스트를 거치고 남으로 내려온 만딩고는 지령을 기다리지만 지령이 오지 않는다. 일단 살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만딩고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위조된 명문대 졸업장으로도 취직 자리를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고 전기와 수도가 끊기고 유일한 낙이던 TV조차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끝없이 면접을 보고 이력서를 쓰는 날들이 이어진다. 그러다 어느 기업에 합격이 결정된 날 만딩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회사원 생활도 지옥인 건 마찬가지였다. 과중한 업무와 밥 먹듯 해야 하는 야근, 딱 중간의 사원이 되는 것조차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간첩 훈련보다도 백배는 힘든 회사원 생활. 겨우겨우 적응해 가던 와중에 간첩이라는 것을 들키게 된 만딩고는 남한의 경찰들에게 쫓기게 된다. 추격을 따돌린 만딩고는 자신의 정체가 어떻게 새 나갔는지 깨닫는다. 같은 남파 간첩인 연락책이 자신을 신고한 것이다. 1억이라는 포상금 때문에, 남조선에서 낳은 자식들과 결혼한 아내를 먹여 살리기 위한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만딩고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간첩 훈련보다 남조선에서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훨씬 힘들다는 것을 깨닫는다. 정말 무서운 건 고문에 가까운 훈련이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간첩 생활이 아니었다. 바로 돈이었다.
앤, 조풍년, 만딩고. 이 셋의 이야기를 보면 지금의 인간 사회가 이미 정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를 죽여야 되고, 합격하기 위해서는 사람으로서의 감정과 마음을 버려야 하며, 돈을 벌기 위해서는 사람답지 못한, 아니 동물만도 못한 짓을 밥 먹듯이 해야 한다. 그런 정글 같은 사회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오히려 세렝게티 동물원이다. 동물로서 일하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횟수에 따라 돈이 나온다. 일한 만큼 돈을 받고 누군가를 나 대신 희생시킬 필요도 없고 퇴근만 하면 다시 제대로 된 사람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고 정글 같은 사회와 맹수 같은 인간들이 넘치는 관계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동물원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정글인지,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경계로 동물과 인간이 구분되는지를 알 수 없는 현대 사회를 이 소설을 통해서 목격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자본주의는 이제 인간 위에 자본이, 돈이 군림하는 사회를 만들어버렸다. 돈이 인간에 앞서는 현상 때문에 우리는 인간다운 삶과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이 책은 그 지점을 정확히 찌른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동물, 동물보다 더 동물 같은 인간. 인간으로 살기 위해 동물이 되어야 하는 아이러니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은 어딘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이제 동물원에 간다면 동물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될 것만 같다. 어딘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해 동물의 탈을 쓴 존재가 있을 테니까.
소설 속 한 문장
뛰면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 뛰면 서서히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