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 쓰는 공대생 Aug 31. 2019

열광금지, 에바로드

'열광금지, 에바로드' / 장강명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장강명 작가님의 책은 어떤 걸 읽어도 실패하지 않는다는 믿음 같은 게 있다. 한국이 싫어서나 표백, 호모도미난스, 당선합격계급 모두 재미있게 읽었고 계속해서 작가님의 책을 과거부터 하나씩 거슬러 올라오면서 읽고 있는 중이다.(희대의 명작 클론프로젝트도 중고서점을 뒤지며 찾고 있다. 혹시 집에 가지고 계신 분 있으시면 제가 사겠습니다, 연락 주세요!) 단문과 서사 중심의 소설을 좋아하는 나에게 딱 맞는 소설이 바로 장강명 작가님의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읽은 소설은 열광금지,에바로드. 에바로드라는 실화 다큐멘터리를 토대로 쓰인 소설이다. 읽으면서 느낀 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겠다. 누군가에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 누군가에게는 세상이 흔들릴 만큼 중요하고, 그 무언가에 온 힘을 다해 열광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꽤 멋있다. 그것이 일이든, 사랑이든, 스포츠든, 게임이든, 우표수집이든, 애니메이션이든.


어릴 때부터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의 덕후였던 박종현 씨는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에 참여해 프랑스, 미국, 일본, 중국 4개국을 돌며 스탬프를 받는 과정을 촬영해 열광금지, 에바로드 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그 다큐멘터리를 보고 박종현 씨를 취재하게 된 신문기자인 '나'는 그 다큐멘터리를 만든 박종현 씨의 삶 자체에 흥미를 느끼고 박종현 씨에게 당신이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과정과 당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다는 제안을 한다. 박종현 씨가 몇 가지 조건을 약속으로 그 제안을 수락하고 '나'가 박종현 씨와의 대화를 토대로 박종현 씨의 지금까지의 삶과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에 참가하게 된 이유,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 등을 책으로 펴낸다. 그 책의 내용이 바로 이 열광금지, 에바로드라는 소설인 것이다.


처음에는 이게 소설인 걸 알고 봤는데도 실화를 쓴 줄 알았다. '나'가 장 씨의 기자인 것도 그렇고 실제로 에바로드라는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 완주 과정을 찍은 다큐멘터리가 존재한다는 점, 소설 속 설정 자체도 책을 쓴다는 내용이었던 점 등에서 아, 이게 소설이 아니라 진짜 실화인가? 아니면 적어도 90프로 이상은 실화 바탕일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다. 필자가 이전에 에바로드라는 다큐멘터리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7:3 정도의 비율로 사실과 허구가 섞여 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8.5:1.5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실제로 누군가의 삶을 엿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소설 속 박종현은 대중들이 흔히 생각하는 애니메이션 덕후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실제로 그 지점에서 기자인 장 씨도 놀란다. '안여돼이기는커녕, 굉장히 잘생긴 청년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후에 이어지는 박종현의 삶은 에반게리온 덕후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 만큼 가난하고 바쁘고 어렵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집을 나가고 거절을 못하는 아버지는 무턱대로 남에게 돈을 빌려주고 보증을 서준다. 학창 시절부터 돈을 벌어야 했던 박종현 씨는 중국집 배달, 신문 배달 등으로 생활비를 마련하고 어찌어찌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돈 때문에 허덕이는 생활을 한다. 그렇게 먹고살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하면서도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에반게리온과의 줄은 놓지 않는다. 유일하게 영화관에서 본 영화들이 에반게리온 극장판들이고 자신이 참가할 수 있는 에반게리온 이벤트들에 꾸준히 참가한다. 그러다 조금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생각한다. 이제 먹고살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을. 그리고 집에 돌아와 에반게리온 일본 홈페이지에 들어가자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기네스북 등재 목표! 사상 최강 스탬프 랠리!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 개최!'


박종현 씨는 온갖 우여곡절 끝에 유일한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 완주자가 되고 그 과정을 성공적으로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송한다. 해피엔딩인가? 그렇지만 뭔가가 찝찝하다. 왜 박종현은 이렇게 힘든 삶을 살아야 했는지, 그 과정에서 에반게리온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왜 장 기자에게 덕후는 안여돼 이미지였는지, 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워커홀릭인데 애니메이션을 열심히 보는 사람은 오타쿠, 덕후 라며 눈총을 받는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왜 이렇게 힘든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이 책을 읽는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지, 나는 나에게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지 주위의 시선에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지까지 찝찝함이 확장된다. 얼핏 보면 무모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박종현의 열광금지, 에바로드 제작 과정을 보면서 마냥 대단하다는 생각을 넘어 지금 나의 삶까지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는 정해진 길이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성적을 받아서 수능을 잘 보고 명문대에 들어가서 학점을 잘 받고 스펙을 쌓아서 대기업에 합격하는 것. 그 길을 따라오지 못하는 자들, 애초부터 그 길에 관심이 없는 자들은 주변에서 낙오자 취급을 받는다. 애초에 그 길의 끝에 다다를 수 있는 인원수는 딱 정해져 있는데 말이다, 서울대 정원 몇 명, 삼성 공채 정원 몇 명 이렇게. 만약 그것만이 성공이라면 대한민국에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고작해야 몇 만 명 수준이고 나머지는 전부 실패자가 된다. 애니메이션 덕후 같이 애초에 그 길에 관심도 없는 사람은 그럼 영원한 실패자일까? 그럼 한국 사회는 99%의 실패자와 1%의 성공한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회인 것일까?


난 내가 좋아하는 일 할래 하고 말하면 아직 어리네, 철이 덜 들었네, 생각이 부족하네, 돈도 안되고 안정적이지도 않고 미래가 없네 하는 소리를 듣는 사회에 대해 어쩌라고,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거 할 거야 라고 말하는 소설이었다. 어찌 보면 무모하고 대책 없지만 그게 또 대리만족 아니겠는가. 소설까지 하나하나 현실성 따져가면서 읽으면 읽는 사람이 피곤하기만 하다. 안 그래도 현실이 팍팍한데. 그냥 읽을 때는 재미있게 읽고, 그다음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 저렇게 무모하게는 못하니까 뭔가 보험이라도 좀 있어야 되는데 계획 좀 세워볼까? 정도만 생각해도 이 소설은 당신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어떻게 보면 '표백'의 순한 맛 같은 소설이다. 장강명 작가님이 현재 한국 사회에 대해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표백'은 좀 무서울 정도로 냉소적이어서 이러다 작가님 훌쩍 이민 가시는 거 아닌가 생각도 했는데 이 책을 보고 좀 안심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 누군가에게는 사소할 수 있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사람은 미련한 멋이 있다. 그 우직한 미련함이 사람들을 홀리고 끌어들인다. 이 세상의 모든 덕후들을 존경한다.


소설 속 한 문장 : 열정페이 - 열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급여를 적게 줘도 괜찮다는 개소리.

이전 12화 산 자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